버닝 (2018 이창동 감독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개요
들어가기에 앞서, 이 영화는 아주 사소한 정보나 관점을 제시 받는 것만으로도 감상에 지장이 생길 수 있는 작품이므로, 영화를 아직 감상하지 않았다면 본 문서 열람에 주의할 것을 권고한다.
저한텐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
2018년 5월 17일에 개봉한 이창동의 영화로, <시> 이후 8년 만의 복귀작이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 온 세 젊은이 종수, 벤, 해미의 만남과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2018년 4월 4일 CGV 페이스북을 통해 티져 예고편을 공개했고, 4월 23일 개봉 일자를 확정하면서 메인 포스터와 메인 예고편을 공개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영화화하는 국제적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다. 하루키의 단편 소설 중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지만, 정작 소설의 모티프만 가져왔을 뿐 등장인물의 직업과 성격, 스토리에 변화를 줬다. 기본적으로 미스터리라는 뼈대는 같지만, 후술된 것처럼 영화는 그것만의 키워드들로 전개해 나가기 때문에 두 작품 사이의 간극이 꽤 있다. 윌리엄 포크너의 1939년작 <헛간방화(Barn Burning)>도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이창동은 영화를 “하루키의 세계에 살고 있는 젊은 포크너의 이야기”라 말한 적 있다.
이창동은 <버닝>이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 있을 때 부산국제영화제 좌담회에서 자신의 차기작에 대해 “젊은이들이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나 자기 삶에 대한 생각이 아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개봉 전후에는 키워드를 ‘청춘’과 ‘미스터리’로 놓고 영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해외 및 한국 언론들도 이 테마에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근원이 명확하지 않은 ‘분노’가 이 영화의 중심 키워드로 많이 얘기된다. 시나리오를 쓴 오정미가 이 영화의 초고 제목을 ‘분노 프로젝트’라고 써놓았을 정도였고 이창동도 영화의 가장 출발은 현대인의 분노라고 얘기한다.
영화 속에는 이밖에도 존재와 부존재, 계급 갈등, 고립된 개체, 불확실과 오해, 허무, 이상과 현실 등의 테마가 내재되었다. 그러나 영화를 이 키워드들에 한정시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를 봐도, 최대한 설명을 배제하며 다양한 해석이 나오도록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다. 즉, 관객의 몫이 큰 영화.
제71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5월 16일 오후 6시 30분 뤼미에르 극장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했다. 영화제 기간 동안 비평가들 사이에서 최고 평점을 얻어 화제를 모았으나 본상에서는 무관이었고,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과 벌컨상을 수상했다. 이창동은 수상 소감으로 “영화 버닝은 현실과 비현실, 있는 것과 없는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탐색하는 미스터리였다. 여러분이 그 미스터리를 함께 가슴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미술감독 신점희는 뛰어난 기술적 성취를 보여준 아티스트에게 수여하는 벌칸상을 수상했다.
이후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상영되었다. 아시아 국가들을 비롯 북미와 유럽, 남미 등 문화/지역적으로 고르게 호평받아 최고의 영화를 뽑는 각종 목록에 단골로 올랐다. 대부분 소규모로 개봉됐으나 비평가들과 아트하우스 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해외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주의 영화로 알려졌고, 북미권에서는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1차 후보(숏리스트)에 오르는 등의 성과를 얻었다.
시놉시스
“이제 진실을 얘기해봐”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 분)는 배달을 갔다가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고, 그녀가 아프리카 여행을 가 있는 동안 자기 집에 들러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스티븐 연 분)이라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한다.
어느 날 벤은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대해 고백한다. 그때부터 종수는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등장인물
이종수 역 – 유아인
어린 종수 역 – 조영준
벤 역 – 스티븐 연
신해미 역 – 전종서
연주 역 – 김수경
이용석 역 – 최승호
변호사 역 – 문성근
다양한 해석
분노, 청춘, 미스터리 등이 주요 골자로 논의되는 영화지만 해석들은 저마다 갈린다. 특정한 메시지 대신 일종의 관점을 던지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결말을 어느 하나로 결론 짓는 것이 의미 없기도 하다.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주인공이 자신만의 답을 냈지만 그 답이 맞는 것인지조차 모호한 것처럼,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나름의 해석을 했을지라도 그 해석조차 확신을 할 수 없으며 종래엔 세상과 영화 자체가 미스터리임을 인식하게 한다. 관객들이 각자의 서사대로 영화를 보기 때문에 그로 인한 다양함이 다시 작품의 서사를 쌓아 나간다. 때문에 본작을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일부 평론가 및 관객들은 영화 속의 메타포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무의미하다고 보기도 한다. 따라서 각 상징들을 해석하기보다 시각적 이미지 자체로만 보는 걸 권유하는 사람들도 많다.
인물과 전개에 대한 해석
영화의 내용은 종수의 소설인가
종수가 소설을 쓴다는 점, 특히 종수가 결행하기 전 텅 빈 해미의 방에서 소설을 쓰는 장면이 있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왔다. 또한 무슨 소설을 쓸 것이냐는 질문에 종수는 “저는 뭐를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세상은 수수께끼 같거든요.”라고 대답한다. 종수를 연기한 유아인은 영화가 수수께끼를 던졌기 때문에 종수가 무엇을 썼는지 말하는 것도 관객들의 생각을 가둘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경우 영화의 어느 시점부터 종수의 소설인지 의견이 갈린다.
일단 영화 전체를 종수의 소설이라 보기도 한다. 영화의 모든 것들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고, 해미와 벤은 실재하는 인물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모호한 말들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 말미 살인 시퀀스부터 종수의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쓸 때부터 시점이 바뀌는 이유를 든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마치 액자식 구성처럼 창틀(프레임)안에 있는 종수를 보여주며 천천히 줌 아웃한다. 이후 벤이 화장실에서 렌즈를 끼고 연주와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영화 내내 종수의 시점으로 나온 이전 장면들과 이질감이 느껴진다. 또한 벤과 해미와의 관계에서 종수는 늘 행동하는 주체가 아닌 반응하는 객체로 있으며 따라서 유아인의 연기도 리액션 연기 일색이었는데, 해미의 방에서 뭔가를 쓰는 장면에서 촬영 방식이 바뀐 이후로 오직 액션만을 취하며 더 이상 리액션이 없다.
종수만의 소설 혹은 상상이 산길에서 벤을 추격하다 들켰을 때부터 시작했다는 견해도 있다. 종수는 벤에 의해 역추적당한 이후 트럭을 두고 언덕을 올라가 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화면에서 보이는 둘의 구도는 비현실적이라 꿈처럼 보이는데 마침 다음 장면에서 종수는 악몽을 꾼 것처럼 잠에서 깬다. 이때부터 종수에게 일어났던 혼란한 상황들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누군지 알 수 없었던 전화는 엄마였고 엄마는 해미가 말한 우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아빠의 재판은 종결됐고 송아지를 팔았다. 벤의 집에 다시 들어가면서 그를 살인자로 거의 확신했고 보지 못했던 고양이를 찾았다. 이후 소설을 쓴다. 이것들은 모두 종수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 플롯일 가능성이 있다. 현실의 종수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지만 종수 내면에서는 바라던 것일 수도 있고, 종수에게 미스터리로 여겨져 혼란만 가중시킨 그것들을 본인 식대로 소설이나 상상으로 해결해 버렸기 때문이다. 종수는 이렇게 비현실을 현실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영화가 종수의 소설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종수가 소설을 쓰는 행위 자체는 작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종수는 소설을 쓰고 싶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다. 후반부 해미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벤을 쫓아다니지만, 종수가 그만큼 해미를 사랑했는지도 불분명하다. 게다가 종수는 해미를 찾는 것인지, 비닐하우스를 찾는 것인지, 벤에게 집착하는 것인지, 심지어 안개 속에서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 모호했다. 즉 소설을 쓰기 전까지 종수는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나 혹은 하고는 있지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과 쫓는 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한 상황에 있었다. 종수가 이런 상황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써야할 것을 찾았다는 의미이자 서서히 점화되고 있는 분노의 원인을 스스로 진단했다는 의미이다. 그 소설의 내용은 종수 내면의 목소리, 바라던 꿈, 희망 등 어떤 것으로든 해석 가능하다. 그래서 종수를 소극적인 인물로 보기도 하지만, 세상의 미스터리를 풀고 자신만의 정답을 찾고자 하는 진지한 인물로 바라보기도 한다.
한편, 종수를 영화의 미스터리에 적극적으로 끌어오는 지점, 혹은 종수를 둘러싼 플롯상의 전환점들이 몇 가지 있다. 해미가 종수를 알아본 뒤 팬터마임을 보여주는 장면, 해미가 어릴 적 얘기를 하며 “이제 진실을 얘기해 봐”라고 말하는 장면, 벤과 해미가 요리를 할 때 벤이 메타포는 종수에게 물어봐야 한다는 장면, 벤의 고백을 들은 뒤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는 꿈을 꾸는 장면, 벤에게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베이스를 느껴야 한다는 말을 듣는 장면 등등.
해미는 어디로 갔는가, 해미는 어떤 인물인가
해미는 종수를 만난 처음부터 팬터마임을 보여주면서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해미의 고양이와 진짜로 존재했는지 알 수 없는 우물도 마찬가지. 이를 두고 해미가 4차원인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억눌린 현실에서도 영혼만은 자유롭고 초월적으로 살아감을 의미할 수도 있다. 분노조차 억압되어 있었던 종수와는 다른 유형의 인물. 특히 해미는 현실을 초월해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때문에 해미를 가족들의 말처럼 ‘말 잘 지어내는 애’라고 치부할 수는 없으며, 이 대사도 해미가 가족에게조차 이해 받지 못할 만큼 팍팍한 현실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해미는 실재한다 아니다의 상태가 중요하지 않은 초월적 삶을 갈망하고, 그레이트 헝거의 꿈을 쫓아 그동안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까지 여행을 간 인물이다. 찰나의 빛을 기다리는 상황에 벗어나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며, 그녀가 팬터마임으로 만들어 낸 새 모양처럼 더 자유롭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해미를 힘든 현실 속에서도 각자의 원하는 것을 추구하려는 보통 청년에 가깝다고 보는 생각들이 있다. 해미는 카드빚을 지며 힘들게 살지만 돈을 모아 여행을 가고, 팬터마임을 공부하면서 누구도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는 삶의 의미를 구하려 한다. 전종서는 모든 게 다 좋아지고 있어도 거기에 따라가기가 너무 벅차지만 현실에 순응하고 있기에는 너무 우울할 수밖에 없다면서, 해미의 삶과 현실을 결부시켰다.
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이유를 두고 벤을 의심하기 때문에, 해미가 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관점이 첫 번째로 있다. 하지만 순전히 종수의 관점일뿐, 영화 속에서 보여준 몇 가지 단서들을 두고 해미의 행방을 확신하기는 어렵다. 결정적이라 생각되는 해미의 시계의 경우, 영화 속에서는 매우 흔한 물건으로 암시되고, 해미가 떠나기 전 벤에게 주고 갔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해미가 종수를 떠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관점이 있다. 해미는 종수의 집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마치 ‘그레이트 헝거’가 된 것처럼 춤을 추고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기를 말하면서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벤의 대사를 보아 해미는 종수를 각별하게 여겼고, (사실이라면) 어릴 적에는 우물에 갇혀 있을 때 종수를 통해 희망의 빛을 보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그레이트 헝거를 추구한 해미는, 노을씬 이후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종수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됐다. 또 다르게는 해미가 자살했을 거라 보는 견해도 있고, 빚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났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꿈꾸며 아프리카 여행을 가는 것처럼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인데, 이런 해미가 발 디딜 곳이 없어졌다는 것은 이상이 좌절됐다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미를 잠적하게 한 원인을 세상 그 자체라고 크게 볼 수도 있다. 슬퍼하며 우는 해미를 보며 신기해 할 뿐이고,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자 하는 노력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쳐다보며, 흥미있어할 뿐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건 영화 속 벤이기도 하지만, 해미와 종수와 같은 이들을 둘러싼 잔인한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극중에서 해미의 서사를 기억해주고 진지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해미는 더욱 외로운 존재로 보인다. 종수는 해미를 제대로 기억 못 하지만 이해하(려)는 인물이었으나, 벤이라는 모호한 세상과 맞닥뜨린 후 해미를 떠나보냈다 볼 수도 있는데, 이것을 혼돈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할 수 없는 현실이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벤은 진짜 살인자인가, 벤의 정체는?
영화가 주는 정보로는 벤이 살인범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벤을 연기한 스티븐 연도 이에 대해 관객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정답을 주지 않았다. 종수가 해미의 행방과 벤에게 집착하는 것을 보여주지만, 영화는 결국 벤이 살인을 했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벤에 대한 정보들은 확실한 것이 아니며 모호할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벤을 향한 분노를 쌓아왔던 종수의 왜곡된 시각이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 각박한 현실에서 제대로 버닝하지 못한 무기력한 종수가 분노를 적립해오다가, 자신만의 시선에 확신을 갖고 또 다른 방식으로 버닝해버린 것이란 시각이다. 여기에는 또, 종수가 해미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벤을 살인자로 확정해버렸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전개에 대해서는 몇가지 얘기들이 있다. 유아인은, 대부분 판단하고 정의내리고 싶어하는 세상이지만 그렇게 해서 내놓아진 정답에 의구심을 품을 만한 시대를 비유한다고 말하면서, 때문에 명확한 메시지를 주는 것보다 세상에 대한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라 봤다. 이창동은, 부유한 벤이 겉으로 보기엔 잘못이 없고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것 역시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벤의 삶과 태도가 자신도 모르게 종수와 해미 같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누군가의 삶이 의도치않게 또다른 누군가에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만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가 발생한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벤은 종수와 해미를 대접하고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그들의 행동과 말을 그저 재미있는 것으로 삼거나 지루하게 여겨 종수를 불편하게 만든다. 이창동은 다른 인터뷰에서 일상의 작은 것들이 때로는 의심, 두려움, 막막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답이 분명하지 않고 삶이 나아지지 않는 세상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 할지 모르는 미스터리가 분노로 이어졌을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벤의 모습처럼, 세상은 겉보기에 세련되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벤이 종수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종수가 살고 있는 파주까지 찾아갈 만큼 애정이 있었고, 종수가 벤의 집에 찾아왔을 때 베이스를 느끼라고 했던 것은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종수가 자기 이야기 같다고 말한 윌리엄 포크너의 책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다. 종수에 의해 죽음을 맞을 때 마치 종수를 끌어안는 듯한 모습도 이런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벤은 많은 것을 가졌지만 동시에 외로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벤이 죽을 때까지도 해미와 종수를 자신에게 흥미있는 존재로만 여겼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종수가 벤을 어설프게 추격할 때 벤이 모르는 척 한 것도 자신을 찾아오고 따라오는 종수가 지루한 자신의 일상에서 그저 재미있게 느껴졌을 거란 의견이다. 벤이 죽기 전 집에서 파티를 즐길 때, 지루한 듯 보이다가 자신을 관찰하는 종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장면에서도 대비를 느낄 수도 있다. 연애감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벤이 종수에게 매우 큰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해석은 무리가 없다.
또한 벤을 어느 캐릭터로 보지 않고 종수가 바라보는 세상의 의인화로 보기도 한다. 종수에게 벤은 수수께끼 같은 세상 그 자체이며 그를 쫓다 끝내 죽이는 건 혼란스러운 세상을 탐색하다 옳든 틀리든 자기의 결론을 내리고 새롭게 시작함을 의미한다는 것. 진실이 무엇이 됐든 그 실체를 아는 사람은 없는 세상이니 아무리 부조리가 만연한다 해도 종수는 뭐라도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시작은 해미의 행방과 비닐하우스 탐색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종수는 진실이 무엇인지 찾기 보다, 답을 이미 정해놓은 채로 단서를 탐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말을 새로운 시작으로 본다면 희망적이다.
고양이는 실재했는가? 벤의 고양이는 보일이 맞는가?
해미는 종수에게 팬터마임을 선보이고, 그것을 생각한 종수가 해미의 집에서 “고양이가 없다는 사실을 잊으면 되는 거지?”라고 묻는다. 그러자 해미는 오히려 웃으며 “내가 없는 고양이한테 밥 주라고 너를 우리 집에 불렀을까봐?”하고 말하며 자신은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맞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집 주인은 이 원룸에선 고양이를 기르는 게 금지돼 있다고 말했으며, 여행을 간 보름 동안 고양이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고양이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벤의 고양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폐증이 있어서 보름 동안이나 이름을 불러도 안 나오던 고양이가, 그때 이름을 부른 것으로 한 번 다가왔다고 그 고양이가 해미의 보일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영화는 미스터리의 체험을 의도한다?
영화가 종수의 시점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관객들은 자연스레 종수처럼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종수의 답인 벤의 살인은 증거가 희미하다. 영화에서 중요한 건 종수가 수수께끼 같은 세상 때문에 쓰지 못했던 소설을 쓴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해석과 답을 찾아내 불확실한 인과관계를 나름대로 명확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종수의 판단에 대한 옳고 그름은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영화가 끝나고 종수처럼 미스터리에 빠진 관객들은 영화 안에 떨어진 퍼즐 조각들을 맞춰나가지만, 무언가 비어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비어있는 조각을 찾아내기 위해 메타포와 상징을 파고 들고, 이러한 해석을 통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건지 파헤친다. 이것은 극중 종수가 비닐하우스를 탐색하고 벤을 미행하며 진실이 무엇인지 다가가려는 태도와 비슷하다. 그리고 관객들은 종수처럼 자신만의 해석본을 내놓는다. 종수가 고양이, 해미의 시계, 벤의 태도 등을 조합해서 결론을 냈듯이, 관객들도 영화 안의 퍼즐을 조립해 이 영화가 무엇인지 결론을 낸다. 하지만 종수의 그 판단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 관객들의 결론도 어느 것이 맞다라고 딱 잘라 얘기하기는 어렵다.
감독의 말처럼 사실은 있지만 그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가 나온다. 이런 불확실함은 영화를 넘어 현실 세계에 도처해 있다. 영화의 퍼즐을 맞춰나가듯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사상이든 철학이든 각자의 결론을 내고 종수처럼 소설이든 글이든 주장이든 각자의 해석과 판단을 표현한다. 그러나 종수의 판단에 대해 확언할 수 없고, 관객들의 영화 해석본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현실 세계에 대한 각각의 판단, 믿음, 사상에 대한 시비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어떤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결국 관객들은 영화 속 종수처럼 미스터리를 체험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객들의 ‘이게 뭐야’라는 반응을 애초부터 원했을 수 있다.
각 상징적 요소들에 대한 해석
각 주인공들의 집
종수는 경기도 파주시 만우리, 해미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벤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에 산다. 종수의 집은 대남선전방송이 들릴 정도로 소란스러운 삶의 터전이다. 내부는 종수를 옭아매는 과거가 있지만, 외부는 자유로운 새들과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으로 애매한 경계에 서 있어 혼란스러운 종수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해미의 방은 북향이라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어두워서 운 좋게 남산타워에 반사되는 빛이 들어올 때만 햇볕을 쬘 수 있다. 벤의 터전은 종수와 해미의 집과 완벽하게 대치된다. 부의 상징임과 동시에 종수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벤은 소란스럽고 초라한 종수의 집에서 그저 경치가 좋다며 무드를 잡고, 살려고 음식을 차려먹는 종수와 달리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취미로 요리를 하며, 용산참사의 비극을 담은 예술품이 있는 곳에서 여유롭게 값비싼 식사를 하는 등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과 그 터전을 재미/흥미로만 바라본다. 불합리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얘기한 것이자, 벤의 대사처럼 가진 자들은 있는 것을 ‘제물’처럼 즐긴다는 것의 메타포. 더불어 벤이 타고 다니는 포르쉐도 종수의 낡은 트럭과 달리 부의 상징일 수 있다.
남산타워의 빛
현실과는 다른 한줄기 희망이라고 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보면, 남산타워의 빛은 사실 빛이 아닌 허상일 수가 있다. 햇빛처럼 보이지만 진짜 햇빛이 아닌 것처럼. 희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고, 종수는 빛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실제인지 허구인지 판단할 수 없는 그 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용산참사 그림
벤이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장소에서 종수가 보던 그림은, 용산참사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정확히는 화가 임옥상의 <삼계화택-불>이다. 사회적 비극도 소비 대상으로 소모된다는 세태 비판이자, 벤 같은 유산계급은 사람이 불에 타 죽는 것을 유희로서 소비할 수 있다는 은유다.
고양이, 송아지, 새 떼
고양이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메타포. 이 고양이를 종수가 보일이라 부름으로써, 종수에게 해미의 고양이라는 사실이 관찰되고,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현실이 확정된다. 또한, 고양이 이름의 원인이 된 보일러는 사람이 다루는 화기 중 가장 불이라는 것이 떠오르지 않는 물건이다.(실제 보일러 속 불을 본 사람은 거의 없듯이). 다르게는 ‘boil’ 그대로 보아 ‘분노가 끓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송아지는 종수에게 내재된 폭력성과 반대 방향에 있는 순수성으로 보기도 하고, 종수를 옭아매는 현실 그 자체로 보기도 한다. 파주집은 종수가 떠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송아지 밥을 주기 위해 이사를 한다. 떠나고 싶은 세상이지만 송아지 하나 때문에 떠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하고, 그래서 종수가 송아지를 파는 건 행동 개시의 전초전이라는 것. 새 떼는 자유롭고자 하는 해미.
비닐하우스
벤의 “연기처럼 사라졌어요.”라는 대사 때문에 해미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하지만 벤의 살인을 확정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종수나 무형적인 것에 가깝다. 벤은 모호한 말을 늘어놓으며 재미만을 추구하기에 그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 오히려 영화 내내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는 건 종수이다. 흔해빠진 것,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존재로서 해미, 종수 모두 해당 된다. 결국 태워진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종수의 욕망이자 ‘베이스’이기 때문이다. 종수가 비닐하우스를 하나하나 조사해 나갈 때 투명해 보이지만 안에는 잘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종수의 옆으로 또 다른 검은 종수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비닐하우스는 영화의 주요 테마인 ‘모호함’, ‘불분명함’을 형상화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비닐하우스는 언뜻 투명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안을 들여다 보려고 하면 잘 보이지 않는다. 극중에서 종수가 찾아다니는 비닐하우스들은 모두 텅 비어있어서, 비닐하우스의 문을 열고 본다 해도 종수에게 미스터리를 풀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비닐하우스는 종수가 그토록 알아내고 싶어하지만 알 수 없고, 도처에 존재해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세상의 진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를 비추어 볼 때, 종수가 비닐하우스와 진실에 대해 쓸모없는 것이라 여기고 무관심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계속 실체를 찾아나가고 진실을 알려고 했기에 집착과 분노가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리틀 헝거 & 그레이트 헝거
종수는 리틀 헝거,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어하는 리틀 헝거이다. 반면에 벤은 그레이트 헝거로 치환 가능하다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벤이 극중에서 뭐든지, 심지어 대남방송까지도 재미있다고 반응하는 것이나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의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유희만을 추구하는 벤 보다는 매사에 진지한 종수나 한단계 높은 차원을 꿈꾸는 해미가 그레이트 헝거일 수 있다.
우물 이야기
해미가 종수에게 해주는 우물에 관한 이야기는 실제와 허구가 뒤섞이며 과연 무엇을 사실로 믿고 기억해야 하는지 어렵게 한다. 종수는 기억 못하는 우물에 관한 이야기를 애틋한 감정을 담아 전하는 해미 때문에 믿게 되었지만 이후 주변인들과의 대화에서 우물이 있지도 않았다는 말을 들으며 진실을 잃어버린다. 이후에는 다시 종수의 엄마가 우물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진짜인지 아닌지 더욱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우물 이야기는 사람이 실제든 허구이든 진실을 받아들일 때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종수가 벤을 살인자로 믿는 것처럼.
우물 자체에 대해서는, 실재를 증언하는 유이한 인물인 해미와 엄마가 카드빚과 급전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일종의 허영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이 우물을 인물들의 처지에 대입하면 어두컴컴한 곳에 갇힌 상황, 그럼에도 남산타워의 빛처럼 한 줄기 빛이 새어나오는 현실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종수는 우물의 존재를 믿으려 하고, 결국 자신이 듣고 싶어했던 얘기를 해주는 엄마의 말을 믿고 비로소 미스터리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내놓는다. 덧붙여 해미가 우물 속에서 구출을 원하고 있음을 비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창동의 인터뷰를 참고해 본다면, 오히려 해미는 구원 자체가 비현실적이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삶을 지탱해 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것은 (해석에 따라 실제, 소설, 상상 등으로 갈리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미스터리를 풀고 자신만의 서사를 확정한 종수의 선택과 맞닿는다. 이런 해석을 통해 우물뿐만 아니라 종수가 쓰는 소설도 허영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들이 이렇게 허구의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생각한다면, 허영이 아니라 삶을 버티는 방법 중 하나는 아닌지 질문이 남게 된다.
종수의 꿈
이걸 종수의 꿈이 아니라 벤의 어릴 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이런 꿈은 종수가 불 타는 것에 희열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시각뿐만 아니라, 종수가 벤을 동경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반면 이동진은 종수가 해미와 벤에게 들은 말이 꿈에 반영된 것이라 해석한다. #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했기 때문에 불타는 장면이 나오고, 해미가 우물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물에 젖어 있는 어린 아이가 나온다는 것.
노을씬 전체
남북의 공간적 경계에 해당하는 파주에서, 경계에 걸쳐진 시간을 의미하는 노을, 현실을 환상처럼 보이게 하는 대마와 술 등이 함께 놓이면서 신비로움을 만들어 낸다. 일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은유하는 이 씬에서 벤은 ‘자연의 도덕’과 ‘동시존재’ 등 자신만의 논리를 늘어놓고 종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 경계의 시간 속에서 종수와 벤은 자기 고백을 하고 해미는 하늘을 나는 새떼 앞에서 홀로 삶의 의미를 구하는 춤을 춘다. 이창동은 이를 두고 68운동에 빗대어 얘기했다. 자유롭고자 하는 해미 앞에 종수의 집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린다. 태극기가 이데올로기화된 현재 거부할 수 없는 질서로 상징될 수 있다는 것. 대부분은 이 씬에서 벤이 비닐하우스를 그저 미끼 던지듯 메타포로 던졌고 종수가 억측한 것에 주목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현실에 지쳐있기 때문에 노을씬처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경계를 허락하지 않고, 종수처럼 미스터리를 하나씩 제거한 후 나름의 답으로 현실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는 관점.
칼
분노의 상징인 칼은 영화 초반 종수가 파주집에서 찾아내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칼은 종수의 아빠 것이다. 결국 종수가 이 칼을 쓰는 것은 부모 세대의 분노가 자녀 세대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으로, 종수가 극중 초반에 칼을 찾아냈기 때문에 결국 종수에게 선택과 결말은 이미 정해져있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허름한 창고 안 금고 속에 감추어있다는 점에서 종수의 숨겨진 분노와 폭력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종수가 벤의 집 화장실에서 보았던 함 속의 미용 도구와 대응된다.
이데올로기적 해석
국가와 개인
주인공의 아버지는 공무집행방해죄로 재판을 받는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당시 군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에 걸려 있는 사진에는 80.5.14 라는 날짜와 CP 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5.18직전에 동료들과 찍은 사진은 아마도 그가 광주에 투입된 군인들 중 한 명이었음을 암시하며, 따라서 그의 분노조절장애도 광주에서의 경험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중동의 건설 현장에서 활약하는 등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 기여한 역군이었으며 부동산 투기를 반대하고 시골에서 농부로 살아가던 애국자였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암소 한 마리 뿐이다. 반면 땅을 사고 건물을 샀던 이들은 일하지 않고도 즐겁고 재미있게 살아간다. 국가를 위해 희생했던 아버지의 분노는 국가를 향하고 국가는 더 이상 이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소설가를 지망하는 종수는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고, 해미는 카드 빚에 쫓겨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은 옥탑방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아버지 세대가 국가를 위해 삶을 바쳤다면 자녀 세대는 자본을 위해 삶을 바친다. 종수가 일하는 곳은 아르바이트 지원자들을 숫자로 부른다. 종수가 빠져도 언제나 그 자리를 채울 젊은이들은 많다. 하나의 인격체가 단순히 숫자로 불리우는 이곳은 바로 자본주의의 세계이다. 그들은 낡진 않았지만 가난하고, 그렇기 때문에 대체 가능한 존재이다.
“한국에는 위대한 개츠비가 너무 많아.” “개츠비가 뭔데?” “뭐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돈은 많은 미스테리한 인물.” |
벤은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의문의 남자이다. 그는 늘 여행을 다니고 포르쉐를 몰며 ‘그냥 노는 게 일’이라고 하는 돈 많은 젊은이다. 사교성 있고 매력적이며 새롭고 쓸모 있는 것들을 잔뜩 가졌다.
참을 수 없는 세계(판타스마고리아)란 어쩌면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추구에도 불구하고, ‘권태와 무위’ 속에서 ‘항구적인 일상적 진부함의 상태’를 살아가게 하는, 그런 세계가 아닐까. 이런 세계는 사유의 불가능성을 조장한다. 반복되는 삶의 패턴들 속에서 사유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조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P.167 |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추구란 소비자로서의 심리 상태를 말한다. 즉 자본주의에서는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그것을 소비하지 않으면 ‘항구적인 일상적 진부함 상태’를 만들어 버린다. 그러한 세계는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에서는 오직 새로운 것을 사는 것만이 ‘일상적 진부함’을 벗어나는 일이자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에 ‘돈’을 가진 자가 가치있는 자가 된다.
따라서 벤이 자본주의가 낳은 유산이라면 해미는 자본주의의 유산에게 희생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벤은 가난, 약함, 낮음(비닐하우스)을 태워 없애는 것에서 희열을 느낀다. 그의 가치관에서 낡은 것을 없애는 것은 새로운 것만 있는 세계를 더욱 빛나게 하며, 그것은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이 낡고 쓸모 없는 것인가?
하지만 종수에게 낡고 쓸모없는 것은 포르쉐와 벤과 자신의 낡은 옷, 즉 기성세대의 오래된 유산인 아무것도 사유할 것이 없는 세계였다. 독재와 자본이 만든 세계. 종수는 결국 이 세계를 파괴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은유와 상징속에서 벤(기성 세대의 유산)을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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