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잡스 프로필 (Apple 창업주 제6대 CEO)
개요
Apple, NeXT, Pixar의 공동 창업주이다. Apple의 제 2대 · 6대 이사회 의장이자 제 6대 CEO를 역임했으며 21세기 혁신의 아이콘이라 평가받는다.
Apple II와 Macintosh의 성공을 통해 PC 시장을 개척했으며, iPhone을 통해 스마트폰을 이용한 모바일 시대를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이를 통해 현재까지도 소비자 전자기기는 마우스와 터치스크린 방식의 인터페이스 입력 방식을 채택하며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로 인해 디지털 라이프스타일 방식의 선구자로 불린다.
제품 개발에 일조하고, 동시에 Apple의 광고 전략과 프레젠테이션를 지휘하면서 독특한 마케팅 전략과 PT 기술로 신제품 발표회를 성공시키며 마케팅 업계에서는 프레젠터이자 광고인으로 유명하다. 창의적인 생각과 행보로 현재의 디지털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위상 및 영향
스티브 잡스는 단순히 능력있는 CEO를 넘어 IT계를 주도한 인물이었고 또한 실적이 부진하거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회사들을 뛰어난 창의력과 적극성으로 기업 가치를 크게 끌어올리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곤경과 실패, 그리고 몰락 역시 경험했으나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로 화려하게 재기했다는 점에서 본보기가 될 만한 인물. 암이 아니었다면 그의 열정과 성취욕으로 볼 때 노년까지 일선에서 왕성히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트렌드를 창조하고 자사 제품을 새로운 메인스트림의 정점에 올려놓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그의 탁월한 안목을 여러 번 증명하였으며 이런 경향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두드러졌다. 마우스, GUI, 컴퓨터 그래픽스, MP3 플레이어와 App Store, 터치 스크린 핸드폰, 태블릿 PC 등은 물론 그만의 발명품이나 유물은 아니지만, 이들의 상용화와 보편화를 가속화시키고 인지도를 대폭 높이는 데에 잡스가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실 2007년 등장한 iPhone은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쉬운 인터페이스와 파격적인 디자인은 전 세계 휴대폰 사용자들을 매료시켰고, 이후 출시된 대부분의 스마트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그는 새로운 기기들의 단순함과 조작의 편리성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적이고 참신한 디자인을 선보여, 출시된 제품들을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하는 능력도 보여주었다. 또한 이미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 후발 주자로 뛰어들어서 단시간 내에 강한 입지를 구축하고 선구적인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던 것을 보면 그의 사업 능력이 상당히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Apple이나 자기 자신의 이미지 관리와 활용에도 능숙했으며, 20세기와 21세기의 IT시장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낭만은 없는 이야기이지만, 기업활동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창출해냈다. 2024년 기준 애플의 시총은 3조 달러이며, 대한민국 GDP의 약 1.7배 수준이다. 앱스토어의 2022년 경제효과만 해도 무려 1조 1천억 달러이다. 애플이 대한민국에만 창출한 일자리가 대략 32만 5천개이다.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면에선 많은 아쉬움과 실망감이 있으나 자신의 카리스마, 추진력, 기획력으로 혁신을 일으키고 기업을 키워내는 능력만큼은 독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2021년 10월 5일, 10주기를 맞이하여 Apple 홈페이지에서 그를 기리고 있다.
경영 철학
프레젠테이션의 귀재로 유명하다.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소개하는 데에 아주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발표 방식을 쓰면서 많은 발표자들의 귀감이 되고있다.
스티브 잡스의 경영 철학은 다음과 같다.
- 경영은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르게.
-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몸으로 뛰어라.
- 항상 새로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기하지 마라.
- 기술력을 과신하기보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라.
- 간단하고 단순하게 하라.
개인사
결론부터 미리 말해두자면 사업가 스티브 잡스는 분명 존경받아 마땅하고 훌륭한 사업가였을지 몰라도 인간 스티브 잡스는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인물로, 일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같이 일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었으며,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성격 결함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척을 지기도 했다.
좋지 않은 인성 때문에 한때는 잡스 소시오패스설이 진지하게 돌아다니기도 했으며, 적도 많았고 때로는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실제로 잡스는 까탈스러운 성격으로 유명했고, 그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서적을 보면 거의 반드시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는 걸 볼 수 있다.
따분한 IT계의 인물인 데다가 일반인들이 그다지 존경하기 쉽지 않은 기업가라는 측면에서 잡스가 대중적으로 상당한 인지도가 있는 것은 독특한 일이다. 이것은 그가 상류층 자제들의 결합 – 서민 가정에 입양 – 특유의 기질로 성공 – 성격과 개인의 결함으로 나락으로 추락 – 전과 다른 면모로 화려하게 부활 – 최고의 자리에 있을 때 젊은 나이에 사망이라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삶을 실제로 살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잡스는 누구의 눈에나 띄일 정도로 대단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수학, 과학에 재능을 보이고 월반도 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도 성격이 사춘기 소년 같았다. 그는 풍족하지 못한 집안 형편 때문에 내심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려고, 서부에서 등록금이 비싸기로는 탑을 다투는 리드 칼리지에 진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경제적 부담을 이용해서 부모를 포기시키려 한 것이다. 그래도 부모는 그를 대학에 보냈고 자신의 의도가 좌절된 것이 너무 화가 나서 잡스는 대학으로 떠나올 때 인사는커녕 부모의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대학교까지 부모가 자동차로 데려다줬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부모를 거부하고 캠퍼스 입구에서 돌려보낸 다음 혼자 걸어들어갔다. 결국 리드대를 1학년 1학기만 다니고 중퇴해버렸는데, 주된 이유는 부모에게 가해질 경제적 압박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신 돈과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하고자 청강생 신분으로 리드 대학에 18개월간 더 머물러 있었다. 아무튼 대학에 입학할 때 부모에게 모질게 굴었던 것이 잡스 본인에게도 꽤나 마음의 짐이 되었는지,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한 인터뷰에서 이 때의 일을 본인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취업 이후엔 막장스러운 행동을 제법 했는데,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인, 그리고 애플의 핵심인 스티브 워즈니악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아타리에서 일할 적에 같이 게임용 기판을 개발했는데, 5,000달러를 보너스로 받고서도 700달러밖에 못 벌었다고 속여서 그 절반인 350달러만 워즈니악에게 건네주었던 사례가 유명하다. 그나마도 잡스는 기판 제작을 잘 몰랐기 때문에 워즈니악이 일을 다했고, 4일 뒤에 개인적으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아타리에서 빨리 끝내라고 했다며 워즈니악에게 거짓말로 재촉한 뒤의 일이다. 워즈니악은 이를 모르고 사흘 밤낮을 독감으로 고생하면서 작업을 했는데 우연히 아타리 측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실망했다고 한다. 절친한 친구를 대하는 태도가 이 지경이었다. 이 일은 아타리의 창업주인 놀런 부슈널도 인정한 사실인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스티브 잡스라는 책을 쓰던 저자 월터 아이작슨이 잡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잡스는 평소와 다르게 입을 다물고 머뭇거렸다가 “그런 얘기가 대체 어디서 흘러 나온 건지 모르겠어요. 늘 제가 받은 돈의 절반을 워즈에게 주었어요. 그것이 제가 워즈와 관련해서 지금까지도 지켜 오는 방식이거든요.” 라고 하였다. 워즈니악은 후에 이 문제에 대해 “만약 잡스가 돈 쓸 데가 있어서 그 돈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면 저는 순순히 동의했을 겁니다. 친구잖아요. 서로 돕는 게 친구 아닙니까. 제게는 언제나 도덕이라는 게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왜 그가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하지만 뭐, 사람들은 다 다르잖아요.” 라고 하였다.
잡스는 애플의 얼굴마담이자 사업가이자 영업맨이었고, 워즈니악은 IT 기업인 애플의 기술을 담당하는 개발자였기에, IT 기업으로써 애플을 보자면 사실 워즈니악의 공이 애플에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결국 IT 기업의 본질은 기술력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 워즈니악만 있는 애플은 덜 유행할지언정 입소문을 타고 존재할 수 있으나, 잡스만 있는 애플은 존재하기도 힘든 수준으로 비중이 갈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본인의 야욕을 위해 워즈니악의 뒤통수를 거하게 친 잡스의 일화는 그의 성격적 결함과 오점으로 남는다. 워낙 잡스가 이미지를 잘 만든 덕에 심지어 애플의 기술이 잡스의 창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수준. 반면 워즈니악은 입지나 유명세에 연연하지 않고 전자 기기의 본질과 인문학에 푹 빠져 있어 남에게 날을 안 세우는 성격이라, 잡스와 대립 각을 세우는 등 고생한다.
Apple로 인해 부자가 된 이후 잡스는 이 경향이 더욱 심해져 돈많은 자아도취형 또라이의 행보를 보인다. 예를 들면 Apple에서 나올 당시, 옛 동거녀였던 크리스앤이 딸 리사를 데려오자 잡스는 그 딸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월 500달러씩 주는 데 그쳤다. 이때 “나는 무정자증이다.”라면서 변명을 시도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이 일은 안티들에게 두고두고 까였으며, 잡스 본인도 나중에는 이 일에 관해서는 다소 쪽팔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정작 당시 개발하고 있던 PC의 이름을 ‘Lisa’로 지었다. 본인도 딸 리사를 이름에 썼다고 인정했다. 딸을 싫어한 건 아니라서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Lisa’ 컴퓨터는 시장에서 통용되지 못했다.
잡스는 조직운영 실패를 경험하고 많은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면서, 딸에게 다정한 아버지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잡스가 리사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건 1991년에 로린과 결혼한 이후(리사 10대 이후)였고, 리사를 받아들이게 된 것도 리사의 친모가 경제적으로 키울 처지가 안되자 딸(리사)만 잡스의 회사에 남기고 떠나서 그런 것이다. 비록 나중엔 딸을 키웠다고 할지라도 이런 잡스를 좋은 아버지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리사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분명 있었다. 이름부터 자신이 직접 붙여줬고, 자신의 회사에서 개발중인 컴퓨터 이름을 애플 리사로 지었다. 또한, 잡스가 젊었고 리사는 유년기였을 때 두 사람이 같이 웃으면서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있다. 대중매체에서도 “난 아버지고 리사는 뭐가 됐든 딸”이란 식으로 복합적인 감정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리사는 잡스에 대해 좀 복합적인 감정이 있었다고 한다. 애초에 부녀 관계를 인정 안하고 어머니에게 모욕을 준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이기엔 쉽지 않았겠지만 나중에 화해하고 부녀간의 관계를 회복한 이후에도 좀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 리사는 감정적으로 힘든 시기를 많이 겪었다. 나중엔 잡스가 리사의 학비조차 챙겨주지 않자 납부 마감일이 가까워 온 리사는 집 근처에 살던 Macintosh 개발진 중 하나였던 앤디 허츠펠드에게 손을 벌리기까지 했다. 그런 중에 당시 옆에서 힘이 되어주던 고모이자 소설가인 모나 심슨에게 그런 사연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는데 나중에 고모가 그 얘기들을 자신의 소설의 자료로서 그대로 대중에게 공개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리사는 다시 한 번 힘들어했다. 잡스도 그 내용에 대해 매우 불쾌해 했다.
그런 잡스도 양부모와 친모는 무척 사랑했다. 친모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는지 나중에 성공한 이후에 비밀리에 사람을 고용해 찾았는데 그 사실이 양모에게 전해지지 않게 조심했다고 한다. 양모 사후에야 친모와 해후했을 정도였다. 양부에 대해서도 잡스는 늘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Apple과 NeXT에서 제품 개발을 진행할 때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야 한다는 등의 양부의 철학을 많이 적용했다고 한다. 본인과 아들의 미들네임도 양부의 이름인 폴을 그대로 사용할 정도다. 게다가 양부모라는 표현조차 좋아하지 않았고 ‘1,000% 진짜 부모’라는 표현을 늘 강조했다. 계모(아버지 폴 잡스가 사별 후 재혼한 여성)인 메릴린 잡스와도 괜찮은 관계였다고 하며, 잡스 가족이 살았던 집은 계모 메릴린 잡스와 여동생인 퍼트리샤 잡스가 소유하며 현재도 거주 중이다.
하지만 친부에 대해서만큼은 지극히 냉담했다. 잡스는 친부를 만나는 걸 내켜하지 않았고 나중에 친부는 잡스가 자신의 친자인 것을 알고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잡스는 냉담하게 거부했다. 그 사람은 정자 은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이 친부는 시리아 이민자 출신이었는데 잡스의 친모 쪽 가정의 반대에도 그녀와 연애를 했으나 이후로 그녀와 헤어지면서 갓 태어난 잡스 역시 버렸다. 친모의 경우엔 그래도 대학에 보내줄 만한 입양 가정을 물색하는 등 자신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리움이 있었던 듯하나 친부의 경우 자신을 버린 데다 이후로도 찾지 않았단 점 때문에 악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잡스는 평생 동안 친부를 찾지 않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둘이 이미 구면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잡스는 Apple에서 성공한 이후 회사 근처에서 가끔 찾던 식당의 홀 매니저가 사실은 친부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경악했다고 한다. 당시에 친부는 잡스가 식당에 오면 유명인이 왔다고 좋아하고 잡스도 그런 대접이 나쁘지 않아 팁을 듬뿍 주던 지인 사이였다고 한다.
‘또라이 제로 조직’이라는 책에 따르면 잡스는 같이 일하기에는 괴로운 상사였다고 회자된다. 그의 밑에서 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잡스는 확실히 일은 훌륭히 해내지만 이 과정에서 부하 직원들한테 자신의 뜻이 잘 전달이 안 되거나 자신의 뜻대로 일처리를 못했을 때 심하게 화를 내는 부류의 상사라고 한다. 일례로 Apple사에서 배달 운반용 차를 대량 구입했는데 이 차의 색상이 Apple사 건물의 색상과 잘 매치되는 흰색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가 떼를 쓰는 바람에 회사가 상당한 금액을 다시 들여 차의 색상을 모조리 그가 원하는 대로 바꿔주었다고 한다. 픽사 인수 직후의 사례도 유명한데 직원들을 통보도 퇴직금도 없이 대량 해고시켰고, 갑작스러운 해고는 곤란하니 2주의 유예 기간을 주는 게 어떻냐고 픽사 실무진이 말리자 그럼 2주 전에 통보했다고 생각하라며 무시했다. 대신 부하 직원들에게 자신이 타던 차, 고급 시계 등을 보상으로 주었으나, 상식적으로 적절한 해고방식이 아니었음은 명확하다. 애초에 해고한 모든 인원들에게 저런식으로 보상을 줄수 있을리도 없고, 잡스는 자신이 인정한 사람에겐 특별한 대우를 해줬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발언권도 잘 주지 않았고 ‘너는 그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며 퇴직금도 거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예시로, 해당 동영상의 인물은 잡스에게 5번 해고당했는데. 처음 해고할시 퇴직금을 주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리다 해당 직원이 직무상 알고있는 경제지 기자들에게 이야기를 퍼트리겠다고 하니까 이를 무마하려고 해고 결정을 취소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물론 동영상 제목에서 보듯 본인은 그럼에도 잡스와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말했지만, 퇴직금을 떼먹힌 모든 직원들이 같은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암에 걸렸을 당시에도 환자용 마스크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쓰기를 거부하다 아내 로린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렸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회담도 자신이 주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려고 했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때는 프레젠테이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하 직원을 향해 “넌 내 시간을 낭비할 뿐이야!”라고 일갈을 날렸다고.
이런 잡스의 막장 행보에 관해서는 윌리엄 사이먼 저 ‘iCon’ 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워낙 신랄하게 비판한 터라, 기껏 공룡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와 대립각을 세우며 ‘정의로운’ 이미지를 구축했던 잡스로서는 대단히 화나는 일이었는지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잡지를 맥스토어에서 다 치워버렸다고 한다.
스티브 워즈니악과의 관계는 애플 창립 직전부터 워즈니악을 이용한 일이 있었기에 사이가 멀어졌는데, 애플 2의 설계에도 둘은 포트 수를 두고 대립했고 나중에 워즈니악이 회사를 떠나면서 소원해진다. 아직 잡스가 Apple로 돌아오기 전 워즈니악이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잡스에 대해 언급한 바에 따르면, 잡스는 워즈니악이 Apple의 주식을 부인이나 친구들에게 나눠줄 때 극구 말렸다고 한다. Apple은 창업주의 것이 아니라 주주의 것이고, 주식이 없으면 Apple에게 워즈니악은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물욕이 별로 없고 베풀어주기 좋아하는 워즈니악은 잡스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주식 대부분을 나눠주었고, Apple의 주식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팔아 써버렸다. 심지어 워즈니악을 호구나 멍청한 아저씨 취급하며 무시했다. 워즈니악과 잡스의 관계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원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안드로이드 폰의 성장세가 두드러지자 그 선봉에 서있는 HTC에게 Multi-Touch 지적 재산권 분쟁도 걸었다. 2011년 7월 판결에서는 HTC의 손을 들어주어 역관광#이 되나 싶었으나 동년 11월 22일 판결에서는 다시 뒤집혀서 Apple의 완승으로 끝났다.
예전 유닉스의 그래픽 UI 등에도 지적 재산권으로 분쟁을 걸려 했지만 썬 측에서 ‘님들 Mac OS 기본은 우리 유닉스에서 따왔다’라는 내용으로 더 이상 분쟁하지 않았다.
외국 사이트 등을 둘러보면 소시오패스가 성공한 훌륭한 예라고 써있기도 한데 이 사람은 행동 양식이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인물이긴 했지만 정확한 진단은 받지 않아서 함부로 취급하긴 그렇다. 아직 소시오패스라는 병명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잡스의 뒤통수치기 행각에 대해서 정리한 글이 있다. 극단적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만 담아놓은 이야기로, 잡스의 행각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한다.
1991년 잡스는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 의해 대통령 수출 위원회에 영입이 거론되고 있었다. 때문에 인사 검증 목적으로 FBI가 잡스의 뒷조사를 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지인들은 FBI와의 인터뷰에서 잡스를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바로 옆집에 살던 이웃은 잡스에 대해 조용하고 잘난 척하지 않는 인물로 칭한 뒤 자신의 집 조경 공사 때는 우리집에 찾아와 공사 때문에 문제가 없는지 물어볼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지인들은 Apple의 성공 이후 그는 때때로 이성을 잃어 분노를 표출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기도 하는 등의 혹평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Apple의 성공이란 복귀 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젊을 때의 첫 번째 성공을 말한다. 이 당시는 NeXT 사장 시절. 결국 스티브 잡스는 결격 사유 없음으로 결론이 나서 대통령 수출 위원회의 위원으로 공직에 봉사했다.
이 시기에 황야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성이 변화하였는데, 그 과도기적 사건이 바로 광포해서 픽사의 창립 멤버 중 하나이자 부사장이었던 앨비 스미스의 이름을 아예 픽사의 기록에서 말살한 사건이다. 애초부터 그는 그냥 잡스와 안 맞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잡스와 열렬한 회의나 논의를 하다보면 항상 둘 사이에는 고성이 오가고 서로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할 정도로 맹렬히 싸웠다. 그래도 스미스는 하고 싶은 소리를 다했고, 잡스도 스미스와 싸우면서도 스미스를 인정하고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러다 마지막 싸움에서 잡스는 스미스의 흉내를 내며 조롱했고, 스미스는 절대로 타인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룰이 있었던 잡스 사무실의 화이트보드에 마구 글을 썼다. 이 싸움 이후 앨비 스미스는 사표를 냈고, 잡스는 사과하면서 회사에 남아달라고 설득했지만 거절당했다. 스미스가 퇴사한 이후 그의 이름은 픽사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이성적인 일에 이성을 잃고 광포한 것은 예전 잡스의 모습이지만 애초에 자신에게 대놓고 대립하는 인물을 중요한 자리에서 내쫗지 않고 그의 의견을 듣는다든지, 싸움 후에 상대방에게 사과하는 일은 이전의 잡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본래 능력 있는 인물을 알아보는 눈이 탁월했지만 그 불같고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못 버티고 떠났다. NeXT의 1992년에서 93년간의 1년 동안 부사장급 9명 중 7명이 떠났을 정도. 하지만 이 시기에 인생의 암흑기를 겪으면서 잡스의 성격은 변화를 겪는다. 이때의 변화에 대해서는 뉴욕 타임스의 “스티브 잡스가 황야에서 배운 것” #이라는 기사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전 잡스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자신이 지시하는 마이크로 매니징에 집착했고 휘하 직원이 뭐라고 조언해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잡스는 드디어 부하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기 시작했다. 단적으로 이전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에서는 오로지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잡스를 띄우기 위한 소품에 불과했고 오로지 잡스를 위한 쇼였다. 하지만 복귀 이후 이런 모습은 없어지고 각 부분의 담당자들이 자기 파트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Apple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디자인의 조너선 아이브, 관리의 팀 쿡, 소프트웨어의 크레이그 페더리기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고,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협상의 에디 큐, 마케팅의 필 실러, 하드웨어의 밥 맨스필드라는 Apple의 분야별 전문가들을 알고있을 것이다. 이전의 잡스라면 이런 인물들의 건의는 다 묵살하고 자기 멋대로 아주 사소한 것까지 간섭하고, 잘된 모든 공은 자기가 차지했을 것이다. 또한 잡스의 독차지 때문에 사람들은 실무진들의 이름조차 몰랐을 것이다.
고난을 통해 인간성의 결함이 다듬어진 잡스에게 드디어 능력 있는 인물들을 붙잡아 두고 조화시키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또 한 가지 변한 점은, 이전의 스티브 잡스는 뛰어난 인재를 집어내고 그에게 임무를 맡기기는 하지만 일이 진행되는 동안 사사건건 간섭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기 고집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는데, 고난을 겪고 복귀한 이후에는 “믿지 못하겠으면 일을 맡기지 말고, 일을 맡겼으면 믿으라.”는 경구에 충실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복귀한 이후 나중에 iMac이 되는 Apple의 컴퓨터 라인업인 프로젝트 C1의 마케팅을 잡스가 마케팅 전문 회사에 일을 맡겼는데, 이들이 iMac이라는 이름을 뽑아낸 뒤에 잡스를 만나러 갔다. 거기서 잡스는 Apple에서 C1에 멋진 제품명을 지었는데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한다. 잡스가 보여준 이름은 필 쉴러가 지은 MacMan. 시걸은 잡스에게 MacMan은 소니 제품의 뉘앙스와 여러 가지 이유로 좋지 않다고 말하자 잡스 자신은 MacMan이 맘에 든다며 고집을 부렸다. 최종적으로 iMac으로 결정하기 전까진 고집을 꺾지 않았으나 그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꺾은 것 자체가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일화
잡스는 이들에게 MacMan이 Apple의 마케팅 부사장 필 실러의 아이디어라고 밝혀주었다. C1 마케팅을 맡은 마케팅 전문회사의 켄 시걸은 MacMan은 부적합하다 iMac이 낫다고 말했지만 잡스는 고집을 부렸다. 그러면서 다음 미팅까지 MacMan을 능가하는 다른 이름을 지어오지 않으면 MacMan으로 하겠다고 한다. 두 번째 미팅에서 잡스는 새로 마케팅 회사가 뽑아온 이름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여전히 MacMan이 좋다고 하자 켄 시걸은 다시 iMac을 제안했다. 잡스는 iMac이란 이름이 싫지는 않지만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며 MacMan이 낫다고 말한다. 두 번째 미팅 다음 날 잡스는 iMac으로 결정하자고 한다. 나중에 Apple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잡스는 iMac이라는 이름이 어떤지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고, 실제로 실크스크린으로 iMac을 C1에 프린트해서 한동안 들여다 보기도 한 뒤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이로써 iDevice가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고집불통 잡스였다면 스스로 뽑은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MacMan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것이고, iPod은 PodMan, iPhone은 PhoneMan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황야에서 고행을 마치고 돌아온 잡스는 비록 그 못된 버릇을 완전하지는 못해도 얼마나마 고친 것이다.
잡스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 면접자에게 대놓고 인격적인 모욕을 가하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성격에 문제가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일련의 사건을 겪긴 했지만 그렇다고 인격문제를 많이 고친 건 아니어서 이후로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자신의 차량이 도둑에게 털린 경험을 겪고 죽기 직전까지 항상 자신의 차량이 잘 보이는 장애인 주차 구역에 차를 대곤 했으며, 차에는 번호판도 안 달고 다녔다. 이유는 번호판을 달면 차 디자인이 안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핑계고 단지 회사 바로 입구 장애인 주차공간에 자기 차를 대기 위해서 번호판을 안 단 것이 맞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법적으로 차 구입 후 6개월 안에 번호판을 달아야 하는데 그걸 싫어해서 6개월마다 같은 차인 메르세데스-벤츠 SL 55 AMG를 새로 리스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가 성격 때문에 잃은 것에는 그 자신의 목숨도 포함된다. 고집을 좀 꺾었다고는 해도 그는 암을 치료하자는 의사들의 말을 처음엔 무시하고 몇 달간 대체의학을 고집하는 바보짓을 벌였다. 마음을 고쳐먹고 늦게 치료를 받았지만 이미 늦어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췌장암이 치료가 어렵기는 했으나 비교적 일찍 발견했고 췌장암 중에서도 치료율이 굉장히 높은(1기때 제거시 5년 생존율 75퍼센트) 종류(islet cell neuroendocrine tumor)이며 더불어 세계 최고의 기업 중 하나인 애플의 수장인 스티브 잡스인 만큼 의료계에서 내놓으라는 일선의 의료 인력들과 인프라들이 투입되어 매우 높은 확률로 생존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병에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인간성 문제를 Apple의 약점으로 잡고, Apple의 라이벌 소니의 애니메이션 제작/배급사인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은 잡스가 사망하자 얼마 뒤, 제작 중이었던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2에 스티브 잡스를 대놓고 조롱하는 요소를 많이 박아넣었다. 영화를 보면 잡스의 흑역사이자 부정적인 면인 인간성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단순히 부정적인 면만 객관적으로 비판하는건 오히려 호평을 받아야 하는데, 문제는 이 영화에 나온 요소들의 대부분은 유언비어이며 근거가 없다. 심지어 객관적이지 못하고 Apple을 향한 소니의 질투심이 드러날 정도로 풍자가 주관적이며, 아예 스티브 잡스뿐만 아니라 Apple을 빌런 집단으로 묘사한 점에 대하여 비판받았다. 또한 애플과 잡스의 긍정적인 평가와 업적까지도 모두 부정적이고 편향적으로 묘사한 건 비판받아도 마땅한 요소다.
책 출판
사망 직후 전 세계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던 공식 전기가 출간되었다. 책 자체는 2011년 11월 21일에 나올 예정이었지만 잡스 본인의 사망으로 인하여 집필 속도에 불이 붙음에 따라 한 달이나 이른 2011년 10월 25일 전 세계에 동시에 출간됐다. 제목은 Steve Jobs. 월터 아이작슨이 집필했으며, 이 작업을 위해 잡스 자신과 가족, 그리고 동료들에 대한 모든 접근 권한을 얻었다고. 출판도 안 된 상황에서 국내외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결국 출간 하루 만에 가뿐히 1만 부를 돌파했다고 한다.
저자 아이작슨은 책의 서문에서 잡스의 전기를 집필하게 된 연유를 밝혔다. 잡스와 친분이 있었지만 그렇게 허물없이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내 전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다소 의아했었고, “당신은 아직 살 날이 많고, 때문에 혁신을 거듭하는 당신의 인생이 아직 더 남아있을 것이므로 전기를 쓸 때가 아닌 것 같다”며 두 번이나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잡스가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은 채 홀로 암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겠구나’ 싶은 충격과 안타까움에 집필 요청을 수락, 곧바로 기록과 저술에 착수했다.
잡스는 아이작슨에게 자신의 전기에 관해 “내가 마음에 안 들어할 법한 이야기도 들어있겠지요?”라고 물었는데, 아이작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알겠습니다. 열받고 싶지 않으니 지금은 읽지 않겠습니다. 한 1년쯤 뒤에 읽어보죠 뭐. 그때까지 제가 살아있다면요.”라고 답했다. 이 때는 이미 자신이 췌장암 투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후였기에 씁쓸한 농담을 던진 것. 안타깝게도 잡스는 이 말을 한 지 두 달 좀 안 된 시점에 세상을 떠났고, 자신의 전기를 읽어보겠다는 말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아이작슨에 의하면, 아직 미공개 신제품에 대한 이야기 등 Apple의 전략 사정으로 올리지 못한 내용이 많으며, 이는 나중에 재발간으로 보태겠다고 밝혔다. 이 내용 중에 계속 떡밥이 나오는 새로운 TV에 관한 내용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도 은근 많다.
전기로서 상당부분 중립적으로 서술되었다. 잡스가 앱스토어를 반대한 사실도 쓰여져 있으며, 발간 초기 곽재식은 잡스에 대해서는 안 좋은 면을 가감 없이 적었고 오히려 워즈니악을 멋진 시람으로 표현했다고 감상평을 남겼다.
2015년 iPad Pro의 발매로 스티브 잡스의 스타일러스 혐오가 주목받자 일부 극성 Apple 팬들이 “잡스의 스타일러스 발언은 iPad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 공식 전기에는 잡스가 태블릿에 스타일러스를 넣는 것을 혐오하는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다.
그리고 현 CEO 팀 쿡은 Apple Pencil이 스타일러스가 아니라 펜슬, 즉 연필이라고 반박했다. 분명 iPad Pro에 펜슬을 쓰는 모습을 보면 잡스도 기뻐할 거라고 한다.
잡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 사람은 마이크로소프트가 태블릿 PC 소프트웨어로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라고, 그래서 노트북 컴퓨터들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그러니 Apple은 자신이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에 대해 라이선스를 얻어야 한다고 계속 나를 괴롭혔지요. 하지만 그의 기기는 완전히 잘못된 방식을 쓰고 있었어요. 스타일러스가 딸려 있었거든요. 스타일러스가 있으면 끝이에요. 그날 저녁 그 사람은 나한테 그 얘기를 열 번쯤 했을 겁니다. 나는 지긋지긋해져서 집에 돌아와 이렇게 말했지요. “웃기고 있네. 진짜 태블릿이 어떤 건지 보여주지.” 다음 날 잡스는 회사에 출근해 자신의 팀을 모아 놓고 말했다. “태블릿 컴퓨터를 만듭시다. 단, 키보드나 스타일러스가 딸려 있어선 안 됩니다.”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터치해 입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처: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민음사, 2011. 738p
2002년 잡스는 자신이 개발한 태블릿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대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엔지니어 때문에 짜증이 났다. 그것은 스타일러스나 펜을 써서 스크린에 정보를 입력하는 방식이었다. 그 해에 몇몇 제조업자들이 그런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태블릿 PC를 출시했지만 그중 어떤 것도 우주에 흔적을 남기진 못했다. 잡스는 PC의 올바른 표본을(스타일러스를 사용해선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출처: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민음사, 2011. 773p
대중 매체
현재 스티브 잡스를 다룬 영화는 두 편이 존재한다. 애쉬튼 커쳐가 주연한 《잡스》는 조슈아 마이클 슈턴이라는 주로 인디 영화를 찍었던 경력의 감독이 찍은 영화며, 전기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2002년까지의 이야기만 다룬다. 처음에는 독립 영화였으나 커처의 젊은 시절 잡스와의 높은 싱크로율 덕분인지 Apple사에서도 간간히 도움을 주었다는 얘기가 있다. 2013년 선댄스 영화제에 공개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한국에서는 2013년 8월 29일에 개봉했다.
이와는 별개로 할리우드의 명망 있는 각본가인 에런 소킨이 각본을 쓰고, 대니 보일이 감독을 맡게 된 마이클 패스밴더의 주연 영화 유니버설 픽처스의 《스티브 잡스》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야말로 스티브 잡스 전기에 기반한 영화며 스티브 워즈니악이 자문을 맡고 있는 어떻게 보면 진정한 잡스의 전기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잡스 역에 확정된 배우는 크리스찬 베일이었는데, 얼마 안 돼 베일이 하차하고 마이클 패스벤더가 잡스 역을 맡아 2015년 초에 촬영에 들어갔다. 역시 캐스팅 문제와 이로 인한 제작 지연에 계속 시달린 소니도 프로젝트를 포기했고, 이어 유니버설 픽처스가 배급을 맡기로 결정했다. 북미에서 2015년 10월 9일에 개봉했다. 북미에서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 있는 단 4개의 극장에서만 개봉했는데 한 개관당 평균 13만 381달러를 벌어들이며 주말 3일 동안 52만 1522달러를 벌었는데 박스오피스 16위로 데뷔하며 심상치 않은 대박의 기운을 풍겼다. 한국에서는 2016년 1월에 개봉. 이야기는 1998년 첫 iMac까지의 세 가지 제품 발표를 중심으로 할 예정이라고 한다.
1999년작 《실리콘밸리의 해적들》(Pirates of Silicon Valley)은 Apple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탄생,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의 갈등을 다룬 TV 영화로, TV 영화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양측에 대한 균형적인 묘사와 고증으로 호평받았다. 대표적으로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Windows 발표 이후 잡스와 게이츠의 말싸움은 스티브 잡스 전기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 일화. 잡스의 치부를 노골적으로 담고 있는 영화라 잡스는 이 영화를 매우 싫어했지만, 반면 스티브 잡스 역을 맡았던 노아 와일의 연기는 좋아했고, 이후 와일은 Apple의 키노트에 참여해서 잡스 대신 키노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워즈니악은 잡스와 다르게 “영화가 매우 정확하다”며 레딧의 IAMA와 자신의 사이트에서 영화에 대해 언급했고, 크게 호평했다. 다만 의외로 거의 도플갱어에 가까운 게이츠, 잡스, 폴 앨런, 스티브 발머와는 달리 워즈니악은 싱크로율이 그리 좋지는 않다. 실제 워즈니악은 매우 듬직하고 남성적이고 강한 인상인데 작중에 출연하는 워즈니악은 다소 부드럽고 샤프한 이미지이며 모발과 수염색도 달라 워즈라고 언급하지 않으면 딱 봐서는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문명 5 확장팩 신과 왕에서는 위인 계열 유닛으로 나오는데, 위대한 상인이다.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는 항상 강매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호머 심슨은 물론이고, 리사 심슨과 신도 쩔쩔 맨다. 하지만 바트 심슨은 오히려 이를 악용해서 앱등이들과 잡스를 엿먹였다.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에선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iPad의 후속작으로 인간지네 iPad, 이른바 HUMANCENTiPad를 개발한다. 사진 카일 브로플로브스키가 iTunes 업데이트 약관을 읽지 않고 동의했기 때문에 Apple에 납치되어 iPad로 일본인 남성과 미국인 여성과 하나가 되는 인체 개조를 당한다. 그리고 이 제품은 이놈의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카일의 아버지인 제럴드가 앱등이가 되는 조건으로 문제가 해결되고, 잡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제품 공개 한 시간 만에 분리 수술을 해준다. 이때 잡스가 카일에게 ‘당분간 일식은 싫어하겠구나’ 라며 개드립을 친다. 그리고 전부터 iPad에 목말랐던 카트먼은 폭발하여 하늘을 향해 신에게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퍼붓다가 벼락 맞고 병원에서 울부짖는다.
드라마 《닥터후》에서는 사후세계 네더스피어에 있다고 한다. 정확히는 저승인데 iPad가 있냐고 묻자 스티브 잡스도 여기 있는데 뭐 이상할 게 있냐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만화 《세인트 영멘》에서는 천국에 온 후로 영혼 입국 시스템을 파격적으로 뜯어고쳐놔서 접수 담당인 12제자들이 여러 가지로 한가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영화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2》에 패러디된 인물이 등장한다. 이름은 체스터 V로 잡스같이 혁신적인 위대한 발명가다. 소니 픽처스에서 만든 것이라서 처음에는 Apple에서도 호평을 하고 기대를 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이제보니 악질 빌런으로 등장하였으며, 이를 알아챈 Apple 또한 분노하여 Apple과 소니의 사이가 잠깐 나빠졌다. 그리고 Apple의 팬들 또한 소니에 반감을 가지고 이로 인하여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2의 평가도 까이게 된다.
코미디빅리그에서 김인석이 스티브 잡스를 패러디한 인물을 2개의 코너에서 선보였다. 황천길 닷컴 코너에서는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여 황천길로 가는데 다른 등장인물들이 삼성전자의 제품을 소유했거나 삼성동을 언급하면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명사특강 코너에서 다시 선보이는데 이름을 살짝 바꾼 스티브 잡수가 되었다. 소개멘트는 ‘날 잡아 잡수, 스티브 잡수입니다.’로 시작하며 혁신이랍시고 아이 메주 화이트를 만드는 등 휴대폰 사업을 접는다며 희한한 아이템을 소개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고인드립의 소지 때문에 좋은 반응은 없었고 두 코너에서 모두 금방 새로운 캐릭터를 들고 나왔다.
한국 JTBC의 예능 잡스의 모티브가 되었다. MC들이 스티브 잡스 코스프레를 한다.
기타
잡스의 성은 원래 /dʒɒbz/로 발음된다. 원래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다면 조브스가 되겠으나, 아무래도 잡스가 미국인이라 본인이 사용하던 미국식 영어에서 저 /ɒ/를 용인발음보다 더 큰 개구도로 발음했던 점, 굿(good)이나 랍스터(lobster)처럼 어말이나 자음 앞의 유성 파열음을 받침으로 적는 관습 때문에 해당 표기가 공식 표기가 되었다. 언론 보도나 서적 등에서 영어권 인명을 한글로 표기할 때, 뒤에 오는 s의 처리는 원어와 동떨어지거나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외래어 표기 용례의 표기 원칙 제6장의 규칙 중 하나인 어말의 -s[z]는 ‘스’로 적는다는 것을 따라 원어와 동떨어지게 된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성격에 대해서 사람들은 불같고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사람이면서, 또한 카리스마가 있고 리더십과 사람들을 설득 수 있는 어떤 믿음을 주는 성격이라고 생각할 것 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님은 어렸을 때 이렇게 고집스럽고, 무섭고 카리스마 있고, 설득력이 뛰어난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수수하고 소심한 성격을 지닌 흔한 공대생에 워즈니악처럼 장난을 많이치고 성격이 조금은 지는 걸 싫어하는 유치한 스타일에 더욱 가까웠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매체에서는 잡스가 자신의 단점 혹은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려고 약간은 사이코스러운 성격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종교는 선불교로 리드 칼리지 철학과를 한 학기만 다니고 중퇴한 후, 사과 농장에서 히피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일본 선불교 승려인 오토가와 고분 치노를 만나 선불교에 입문했다.
왼손잡이다. 다만 수기는 오른손으로 썼다. 스티브 잡스의 대표적인 이미지인 손으로 턱을 쥐고 있는 사진도 잘 보면 왼손을 쓰고 있다.
밥 딜런의 광팬이었고 그를 매우 존경했다. 딜런이 녹음한 773곡 전곡이 담긴 디지털 패키지 세트를 iTunes Store에서 판매하기로 했는데 상품의 출시를 알리면서 잡스는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이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하다”고 소개했다. Apple 초창기 잡스는 100시간 분량이 넘는 1960년대 딜런 음악 해적판을 수집했다. 월터 아이작슨이 저술한 잡스 전기에 따르면 그와 Apple 초기의 스티브 워즈니악은 딜런 팬으로서 마음이 맞았다. “딜런의 노래책을 구입해 가사를 해석하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고 워즈니악은 말했다. “딜런의 가사들은 창조적 사고를 불러내는 주문이었다.” 그 뒤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밥 딜런의 곡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 마침내 딜런과 상봉했다. 잡스의 전기에 따르면 두 사람은 “딜런의 방 앞쪽 테라스에 앉아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잡스는 긴장했지만 그의 우상은 “내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정말로 허심탄회하고 솔직했다.” 잡스가 기억하는 한, 그가 너무 긴장해서 말이 잘 안 나온 적은 오직 밥 딜런을 만났을 때(2004년 10월)뿐이었다’는 대목도 있다.
비틀즈의 광팬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의 아이폰에는 비틀즈의 명곡인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무려 10개가 넘는 서로 다른 버전으로 담겨져 있었을 정도였다. iTunes는 이후 최초로 전 세계에서 비틀즈의 모든 곡을 감상할 수 있는 음원 서비스가 되었다. 이는 Apple과 동명의 회사였던 비틀즈의 음반사 애플 레코드와의 분쟁 때문인데, 2004년 즈음 Apple의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복잡하게 꼬인 저작권을 모두 인수하였다. 이후 2009년 비틀즈의 음원이 스테레오 기반으로 리마스터링된 뒤로 2016년이 되어서야 기타 음원 사이트에 비틀즈의 곡이 서비스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 Billie Jean을 즐겨 들었다고 한다. 일을 하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 Billie Jean을 들었다는 후문이 있다.
워즈니악의 증언으로는 아인 랜드의 움츠린 아틀라스를 좋아했다고 한다.
반전 가수로 유명한 조안 바에즈와 잠시 사귄 적이 있었는데 잡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고 나중엔 그냥 친구로 남았다.바에즈가 밥 딜런의 전여친이기에 사귄 것이란 얘기도 있으나 바에즈 측에서 이를 ‘이상한 소리’라며 일축했다.
비건 채식주의자였고, 견과류와 물만 먹었다고 한다. 로린 파월과 결혼하기 전에는 떨어진 과일만 먹는 극단적 채식주의자였다가 결혼할 때쯤 비건으로 전향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에는 의사 권유에 따라 잡식을 했다. 채식주의자였지만 가족과의 일본 여행 때 장어 초밥만큼은 너무도 좋아했다고 한다. 훗날 영화 <잡스>에서 잡스 역을 맡은 애쉬튼 커쳐도 영화 촬영 당시 메소드 연기를 위해 물과 견과류만 먹다가 췌장에 이상이 생겨 응급실에 호송되었었다.
헤일로: 전쟁의 서막이 출시되기 전 제작사인 번지가 경영 위기로 잡스에게 인수 제안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잡스는 거절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꿔 인수하려고 했지만 마소가 선수를 쳐서 번지를 인수한 상태였고 이에 분노한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에게 항의한 적이 있었다.
펩시의 前 CEO였던 존 스컬리를 Apple의 CEO로 영입할 때의 일화가 꽤 전설적인데, “설탕물이나 파는 거 그만하고 나랑 같이 세상을 바꿔보고 싶지 않습니까?”라고 설득시켰다고 한다. 훗날 스컬리는 잡스를 내쫒아버리는 일을 한다. 그리고 스컬리는 훗날의 iPhone과 iPad의 직계 조상인 Newton MessagePad를 만들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잡스의 말대로 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지만, 이 사람은 ‘사업가’지 절대 ‘개발자’가 아니다. 물론 IT 분야를 제대로 이해하는 유능한 경영자임은 사실인데 위의 FBI 보고서에는 ‘그런데 기술 부분에서는 별로’라는 평가도 있었다. 아타리 근무 시절 게임을 개발한 경험은 있다고 술회되나, 컴퓨터 설계적 측면에서 워즈니악의 공이 지대하다. 그래서 잡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워즈니악이 없었다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인물이란 얘기를 자주 한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물론 워즈니악 본인은 잡스가 없었다면 자신도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았을 것이라며 잡스를 인정해주는 편이다. 애플의 설립과 성장에 있어, 워즈니악과 잡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보는게 맞다.
애초에 그는 조지 루카스로부터 픽사를 인수할 생각이 없었으나 픽사의 인수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픽사의 IPO로 인해 기사회생했고, 직원을 다루는 방식을 변화시키며 한 회사의 CEO로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후 픽사가 디즈니에 인수되면서 잡스는 디즈니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사후 그의 유산은 부인인 로린 파월 잡스가 상속받았으나, 지분을 일부 정리하고 2019년 기준 디즈니의 5대 주주가 되었다고 한다.
Apple의 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켄 시걸은 잡스가 1997년 회사에 다시 복귀했을 당시를 떠올렸는데 잡스는 한 미팅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데스크탑 전쟁은 끝났다. 우리는 (Microsoft에) 패배했다.’고 말했다 한다. 그 말은 더 이상 회사가 Microsoft를 이기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Apple다움’을 다시 이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잡스는 Apple을 BMW에 비교하기도 했는데 BMW의 경우 전체 자동차 시장 점유율로만 따지면 5% 남짓의 소규모 브랜드이지만 여전히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 브랜드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처럼 Apple 역시 양보다는 퀄리티와 혁신에 더 집중하는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잡스는 인식한 것이다.
한평생 같은 패션만 고집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실제로 옷장이 같은 옷으로만 차 있었다고 한다. 대체로 서너 가지 아이템만 사용했는데, 회색 뉴발란스 992 운동화, 리바이스 501, 일본의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인 미야케 이세이가 디자인한 검은 터틀넥, 안경은 Lunor의 classic rund를 사용했다. 만약 스티브 잡스 코스프레가 하고 싶다면 이 아이템들을 갖추고, 추가로 잡스가 프레젠테이션 때 자주 사용한 문구인 one more thing.을 써주면 된다. 즉, 검소한 소비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를 대표적인 예시로 드는 경우가 있는데 상하의에 신발 까지 합치면 100만 원을 훌쩍 넘긴다.
스탠퍼드 대학교에서의 축사 연설 중 일부. 12분 30초부터.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들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고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통념, 즉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잡스의 이 스탠퍼드 대학교 연설은 아직까지도 명연설로 꼽히며 유튜브 조회수 4,000만 건을 돌파했다.
연봉 1달러 CEO로 유명하다. 대신 주식(Apple, 그리고 디즈니)이 있다. Apple, 디즈니 주식을 반 정도 매각해 약 5억 달러의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연봉 1달러 CEO는 단순히 본인이 그렇게 돈에 욕심이 없는 리더라는 모습을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치장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오히려 돈 욕심이 상당히 과도했다. 넥스트에서 Apple로 복귀하고 길 아멜리오를 축출한 다음 iMac으로 회사를 살려놓았음에도 연봉 1달러로 남아있자 거기에 감동한 이사회에서는 여러 보상을 제시했지만 전부 다 거절하고 대신 ‘개인용 제트기 하나 있었으면…’ 하자 걸프스트림 제트기를 냉큼 한 대 주문했다. 그러자 잡스는 사실은 스톡옵션도 좀 챙겨주세요 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를 제시해 제트기 한 대로 끝난 줄 알았던 이사회는 당황했고 결국 스톡옵션을 달라는 대로 줬다. 하지만 그 직후 Apple 주식이 폭락하면서 옵션 행사에 실패하자 그걸 무효로 하고 다른 스톡 옵션을 더 달라고 요구해서 거기에 휘둘린 이사회가 좀 불법적으로 무리를 해서 원하는 대로 해줬지만 결국 미국 증권 감독원에 걸려 거액의 벌금과 함께 관련된 CFO가 희생양이 되어 회사를 그만둘 정도의 큰 문제로 비화된다. 돈에 대해 외부에는 청렴한 모습을 보여주고 내부에서는 회사에 많은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무리하게 챙기려고 했던 잡스의 속물적 이중성을 잘 보여준 사례. 동반 창업주이자 실작업자에 친우이기까지 했던 워즈니악을 속이고 5,000달러 중 350달러만 준 일화에서도 그렇듯 잡스는 돈을 위해 인생의 다른 귀중한 것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이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iPhone 4의 수신률 불량 문제에 대해, 개인 이메일로 “그렇게 안 잡으면 될 거 아니냐.”고 대답한 사실이 밝혀졌다. 개인 이메일이라면 시니컬한 성격의 잡스니 봐 줄 만하겠지만, 문제는 저게 iPhone 문제에 대한 Apple의 공식 입장임이 드러났다. 제안한 해결책이 ‘그렇게 잡지 말든가, 범퍼 악세서리 사세요.’였다. 그래서 여러 군데에서 신나게 까였다. 그리고 모두의 우려대로 범퍼 무료 제공으로 대충 때웠다. 이걸로 덮은 후에 2013년에 모든 구매자들이 15달러 환불받는 것으로 안테나게이트 소송전이 끝났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에서 나오는 내용으로는 이런 성의 없는 대응이 iPhone 4의 결함이 언론에서 과장된 바와 다르게 큰 문제가 아닌 듯 보이기 위한 ‘계획된 대응’이었고, 결과적으로 iPhone 4는 전작의 절반에 불과한 환불률을 보였다.
젊었을 때는 은행에 돈을 빌리러 가서는 은행장의 ‘넥타이가 촌스럽다’고 솔직히 말했으며, 프랑스 대통령 주최의 오찬에 참석해서는 ‘느끼한 프랑스 요리 말고 이탈리아 요리는 없습니까? 지난주에 이탈리아에 가서 먹었더니 참 맛있던데.’ 하고 미식가이자 프랑스 문화 우월주의자인 미테랑 대통령에게 직접 요청하거나 하는 용자의 기질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대학 시절부터 이미 스티브 워즈니악이 제조한 ‘공짜로 장거리 전화를 거는 기계 장치’인 블루박스를 팔아먹었고, 심지어는 동업했던 워즈니악이 그걸 가지고 로마 교황한테 공짜 장난전화를 거는 용자짓도 한 바 있다. 사실 교황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새벽이라 통화는 못 했다고 한다. 교황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헨리 키신저라고 소개했고 그 전화를 받은 한 주교는 “여긴 새벽이니 한 시간 뒤에 다시 거시오”라고 대답하였고 진짜로 한 시간 후에 다시 걸었다고 한다. 이에 그 주교는 “내가 방금 키신저랑 통화했는데 너 키신저 아니지?”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워즈니악이 한 일을 자기가 한 일이라고 허풍을 쳤다. 당시 둘은 그때까진 절친이었고 파트너였다.
자가용으로 애용한 벤츠에 번호판이 없는 채로 다닌 것도 유명한 일화다. 국내에서는 이 이야기에 불법 아니냐는 반응이 있었지만 사실은 캘리포니아 교통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은 것이라는 워즈니악의 증언이 있다. 이에 캘리포니아 교통 당국은 따로 특혜를 주거나 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구체적인 방법은 전기에서 밝혀졌는데, 새 차를 인도받고 6개월이 지나기 전에만 번호판을 달면 되는 캘리포니아법에 따라 6개월마다 새 차를 리스했다고 한다. 벤츠 SL 55 AMG 차종을, 그것도 늘 똑같은 은색 차종을 6개월마다 새로 리스했기에, 합법적으로 번호판을 달지 않은 벤츠를 몰 수 있었다.
또 Apple의 주차장 중에서 장애인 구역에 차를 대곤 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워즈니악에 의하면 Apple 주차장에 세워둔 잡스의 벤츠가 털린 적이 있었다. 사무실 창문에서 잘 보이는 곳에 차를 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Apple 직원들은 차에 Park Different라 써진 쪽지를 붙여놓는 것으로 대응했다. Apple의 광고 슬로건인 Think Different의 패러디다.
Apple의 성공 신화가 알려지면서 한국에서는 사장님들이 잡스를 성공 지표로 삼고 “자네 잡스라고 아나? 스티브 잡스. 걔가 어떻게 성공했냐 하면 말야.” 라고 운을 떼면서 아랫사람들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붐이 일기도 했다. 어렸을 때 Macintosh Plus를 접하고 머킹보드에서 나오는 음악을 즐기며 PC 잡지 컴퓨터학습(이후 마이컴으로 잡지명 변경)을 통해서 탈모 이전의 잡스부터 그의 활약상을 리얼타임으로 지켜봐온 한국 컴덕후들 입장에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무한도전에서 길이 스티브 잡스를 ‘스티븐 잡스’라고 하는 바람에 웃음거리가 되었지만,사실 본명이 스티븐 잡스이고 ‘스티브’는 스티븐의 애칭으로 널리 쓰이는 것이기 때문에 맞는 말이다. 아직도 유튜브 등지에서 누가 스티븐 잡스라고 말하면 ‘스티브 잡스가 맞다’고 댓글에 아는 척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건 스스로 ‘나 무식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과거 영미권 언론에서도 ‘스티븐 잡스’라고 부른 적도 많이 있어서 까일 일이 아니다.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의 본명은 Stephen이라서 얼핏 잡스의 본명과 달라 보이지만 발음이 같아서, 약칭도 잡스와 같은 Steve를 쓴 것이다.
90년대 한국의 모 잡지의 어느 칼럼에서는 스티브 잡스를 스티브 “랍스”라고 표기했다. 스티브의 혈통이 북유럽계라 잡스를 랍스라고 발음을 해야 맞는다는 이유까지 친절하게 달아놓았지만 스티브의 혈통은 시리아인이고 잡스는 유전적으로 무관한 양아버지의 성인 데다 현지에서 Jobs를 랍스라고 읽거나 하지도 않는다. 북유럽 언어들에서는 ‘요브스’라고 발음한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1983년 11월 당시 삼성 이병철 전 회장과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에서 회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스티브 잡스는 45살 연상인 이병철에겐 거의 손자뻘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훗날 IT계의 거목이 될 인물답게 서로 잘 맞았고 이 당시 이병철 회장은 잡스를 만난 후 “굉장히 훌륭한 기술을 가진 젊은이”라고 평가했다. 또 잡스는 당시에 삼성전자의 매장에 Macintosh를 전시할 것을 제안했지만 당시 삼성은 PC보다는 반도체에 더 관심이 있던 상황이라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이 때 삼성이 이 제안을 승낙했으면 지금 대한민국의 IT 시장이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잡스는 Apple에 복귀 후 처음으로 iPhone을 내놓을 당시에 최초 iPhone에 일부 부품을 삼성제를 쓰면서 iPhone의 제조 비용을 줄이는 데 삼성이 한몫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참고로 스티브 잡스의 죽기 전 유언이라면서 떠돌아다니는 말이 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잡스의 전기를 읽어 본 사람이면 잡스가 이런 말을 할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잡스의 유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기사 해석과 부가 설명
잡스가 CEO로서 겪은 성장담을 읽고 싶다면 월터 아이작슨의 공식 전기보다는 지인이자 포춘 기자인 브랜트 슐렌더가 집필한 비커밍 스티브 잡스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잡스가 경영자로서 불완전했던 시기부터 변화를 일궈낸 일화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지금은 절판으로 중고로 구하는 수밖에 없다.
의외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인데, 밥 아이거가 마블 코믹스를 인수하려는 사실을 알고 마블 본사에 직접 가서 마블의 CEO인 아이작 펄머터를 설득해서 거래가 성사되도록 도와주었다. 이 사실을 아이거가 자서전에서 밝히고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만약 그가 없었으면 현재의 MCU는 없었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와는 애증의 관계였다. 윈도우가 나왔을 때 잡스는 MS가 매킨토시를 완전히 베꼈다며 길길이 날뛰었고 Apple과 MS는 장기간의 소송전을 치르기도 했지만, 후에 잡스가 Apple에 복귀했을 때 서로 화해하고 다시 협력 관계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 후에도 묘한 경쟁 상대이긴 했다. 잡스가 MS가 개발 중인 태블릿을 보고 스타일러스 펜이 끔찍하다며 신나게 까댄 일화가 있다.
그가 게이츠에 대해 평가한 말도 히피적인데, ‘젊었을 때 마약 좀 했다면 사고가 훨씬 유연해졌을 텐데’라고 했다.
아이패드 출시 직후 자녀들의 반응은 어떻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자녀들에게는 아이패드를 주지 않았다는 인터뷰가 있고, 이 인터뷰가 “얼마나 나쁜 것이면 아이들에게 자기 회사 제품을 못 쓰게 했을까” 식으로 어린 자녀들의 스마트기기 접촉을 금지하여야 한다는 논거로 자주 인용된다. 하지만 이 인터뷰는, 이 문서에 나타난 잡스의 튀는 성격과 잡스의 자녀들이 모두 20세기 출생자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아야 한다. 스마트기기가 일상화된 2010년대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고, 이미 학교 교실에 스마트기기를 비치하여 수업시간에 사용하는 시대에, 자칫하면 가정교육만 20년 뒤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
잡스 사후로 가장 주목받는 기술 기업 CEO는 일론 머스크인데 잡스가 가정과 직장에서도 어디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생활용품을 위주로 만들어 왔다면 머스크는 우주 로켓, 전기 자동차, 인공위성 등 소위 중공업이라 불러야 할 영역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격차가 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산업 분야에서 더 간단하게, 더 저비용으로 더 많이라는, 이제 시대에 뒤처졌다고 여겨지던 미국 전통의 포디즘을 부활시켰다는 점은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다.
빌 게이츠와 더불어 자녀들의 스마트 기기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다. 장녀인 리사는 70년대생이라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 기기를 접한 세대는 아니지만 정식 결혼 후 낳은 아이들이 늦둥이라 막내가 1998년생이었다. 가정사에서 언급되었듯 비록 그가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아동들의 스마트 기기 사용에 대한 철학은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잡스는 너무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여 아이패드 발매 이후 자녀들에게 스마트 기기 사용을 제한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후인 2012년에 개그콘서트의 이기적인 특허소에서 파인애플사와 스티브 박스로 패러디되어 박영진이 연기했다.
스타트업계에서는 잡스병이라는 은어가 존재한다. 데모데이나 직원들을 향해 제품 또는 서비스의 혁신을 외치며 다그치지만 정작 내실이 부족한 창업자 CEO를 빗댄 말. 오죽하면 잡스의 지인이자 전기작가인 월터 아이작슨도 전기 10주년판에 잡스병에 걸린 2류 사업가들이,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들이 직원들을 잘 갈구는 것을 보니 자신이 잡스과인 것 같다며 혼자 흐믓해하는 일이 많다는 고충까지 적었다. 그럴 때 마다 마음속으로 “당신도 아이폰같은 것을 만들고 계신가요?” 라고 반문한다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지능검사에서 고등학교 2학년 수준의 수학적 능력이 있다고 판명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커서는 (수학이나 공학 분야에서는)비교적 평범해진 케이스. 그 대신 사업가로서 천부적이었으니 아쉬울 것은 없지만, 본인은 아타리에 다닐 때만 해도 사업가가 아니라 엔지니어의 정체성이 컸던 것 같다.
제품도 그렇고 미니멀리즘을 지향한 것으로 유명하다. 청년시절부터 취재한 사진 중에 그의 집을 보면, 실내에 잡동사니는 물론 가구도 배치된 걸 보기가 어렵다. 더할 게 더는 없는 것이 아니라, 빼야할 게 더 이상 없을 때 완성된다는 현대 디자인 철학을 그대로 지킨 셈.
현대 미술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좋아했던 걸로 유명해서, 대한민국에서 열린 마크 로스코 그림 전시 당시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라고 소개한 바 있다.
스티브 잡스가 신은 샌들이 미국 경매에서 21만 8천 750달러(약 2억 9천만원)에 팔렸다.
스티브 잡스는 경영자로써는 매우 뛰어났지만 안 좋은 점으로는 너무 원칙주의자인 나머지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껴서 해고하는 사람이 한 일에 가치를 매겼다. 이에 이들이 지급해야 할 돈을 요구하면 “너가 그정도의 일을 하지 않아서 못 주겠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이 중 잡스에게 해고된 직원 중 한명은 3만 5천불(약 5000만원)을 퇴직금을 제시했지만 잡스에게 “넌 그만한 가치의 일을 한 적이 없다.”며 거절 당하고 이후 이 직원은 회사를 차리고 나서 멘토나 애플에서 일하면서 알게된 경제지 기사들, 당시 애플 CFO 등등 인맥의 힘을 이용해 다시 잡스랑 만났는데 “자신에게 빚진 3만 5천불을 지불하라”라는 제안에 잡스는 또 거부하며 “내가 왜?”라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에 해고되었던 직원이 “나는 그 돈이 필요하고, 내가 애플에서 일했을 때 경제지 기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좋은 말만 했는데 이들에게 이 일을 폭로하겠다.”는 반 협박성 발언에 그제서야 스티브 잡스가 수표에 3만 5천불을 적고 지불했다고 한다. 이 직원은 이 경험 이후 나름 사업이 굴러가면서 스티브 잡스를 고마워 한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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