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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 프로필 (국민배우)

안성기 프로필 (국민배우)

이름안성기
安聖基 | Ahn Sung-ki
출생1951년 1월 5일 (73세)
경상북도 대구시
국적대한민국
본관순흥 안씨 (順興 安氏)
신체175cm, 75kg, 270mm, B형
가족아버지 안화영, 어머니 김남현
첫째 형 안인기(1947년생), 둘째 형
배우자 오소영(1985년 5월 결혼 ~ 현재)
장남 안다빈(1988년 1월 4일생)
차남 안필립(1991년 12월 22일생)
학력서울돈암국민학교 (졸업)
경동중학교 (졸업)
동성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외국어학부 (베트남어과 / 학사)
종교천주교 (세례명: 사도 요한)
병역대한민국 육군 제12보병사단 포병 중위 제대
소속사아티스트컴퍼니
데뷔1957년 영화《황혼열차》
(데뷔일로부터 +24382일, 66주년)

다음 팬카페

https://cafe.daum.net/AnSungKi

개요

대한민국의 배우.

유년기, 군 복무 시절

안성기는 6살 때 처음으로 연기자가 되었으며 8살에는 김기영 감독의 《10대의 반항》에서 소매치기 역으로 출연해 그해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소년연기상과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서는 9살 때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경동공립중학교 3학년때 선배 배우 이순재와 같은 무대에 섰다고 하며, 당시 명문이던 경동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여 동성고등학교(43회)에 진학했다. 중학교까지 촬영장에서 살다시피 하여 공부 기초가 없어서 고교 진학 후 수학시험에서 백지를 낼 정도였다고 하며 실어증 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이 당시 경동중에서 조용필을 만난다.

아버지가 체육교사로 재직했던 동성고등학교에 다닐 때 이때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큰 형도 참전하였던 것도 영향인지, 뜻하는 바가 있어서 베트남으로 진출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학교를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로 진학했다.

대학에 진학한 안성기는 베트남에 가기 위해 학군장교(12기)를 지원해서 후보생이 되었다. 그러나 안성기가 소위로 임관하기 전에 전쟁이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성기는 포병 소위로 임관해서 열심히 군복무를 했다. 사단장배 음어 조립 해독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자서전에 소위로 근무 할 당시 스스로 시나리오도 몇 편 썼다고 한다. 영화화 하기 보다는 연기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배우 안성기

안성기는 전역을 하고 나서는 회사원이 되려 했으나, 그 베트남이 공산화되는 바람에 전공인 베트남어가 쓸 데가 없어졌던 터라 《병사와 아가씨들》 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다시 연기자가 되었다. 물론 아무리 베트남어가 쓸모없어졌다 해도 그 시대에는 대학 졸업하면 거의 취직이 보장되고, 그 당시 공무원은 행정 고시(현 5급 공채)를 통해 갈 거 아닌 이상 웬만하면 할 수 있던 시절이라 한국외대 나온 장교 출신이 정말 일자리가 없었을 리는 없다. 그보다는 베트남어 전공을 잘 살릴만한 마음에 맞는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본인 회고로는 당시에 워낙 고급 인력이 없으니 베트남 다녀온 장교 출신 친구들은 다 취업 잘 되더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아역 스타 출신은 성인 배우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고정 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였으므로 그가 성인 배우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의심하는 시선이 많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로 충무로에 복귀한 후 이어진 영화의 성공으로 자리를 잡으며 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남자 배우가 되었다. 아역으로 나온 이후 계속 배우 생활을 한 게 아니고, 고등학교-대학교-군복무 시절에 10여년간 배우생활을 쉬었기 때문에 아역 배우 이미지가 탈색된 것도 성인 배우로 성공하게 된 이유중 하나였다. 사실 아역 때에 김정훈 같은 톱스타도 아니었는데, 그것이 성인 배우가 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성공적으로 성인 배우로 안착, 그 시절 화제작들의 주연을 도맡을 정도가 되었다. 특히 80년대를 자신의 시대로 만든 명장 배창호, 이장호 감독의 영화들에서 주연을 맡아 작품성과 흥행 모두를 잡으며 배우로서의 가치를 높였다. 198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은 여배우들 대부분이 안성기의 상대역을 했다.

그와 출연해서 흥행한 작품만 모아 봐도

적도의 꽃(1982. 배창호 감독. 장미희 주연)

고래사냥(1984. 배창호 감독. 이미숙, 김수철 주연)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이장호 감독. 이보희 주연)

깊고 푸른 밤(1985. 배창호 감독. 장미희 주연)

어우동(1985. 이장호 감독. 이보희 주연)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 이장호 감독. 최재성, 이보희 주연)

겨울 나그네(1986. 곽지균 감독. 강석우, 이미숙 주연)

내시(1986. 이두용 감독. 이미숙 주연)

황진이(1986. 배창호 감독. 장미희 주연)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배창호 감독. 황신혜 주연)

정도나 된다.

신현준도 그가 출연한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을 보고 배우가 되었다고 훗날 무릎팍 도사에서 밝혔다. 《태백산맥》 촬영 당시 안성기와 같은 숙소 같은 방을 썼을 때 신현준은 이 사실을 안성기 본인에게 털어놨는데 그 때 안성기는 눈도 안 마주치며 응~ 그런 애들 많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안성기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자신의 수첩에 기록하는 신현준의 행동에 그만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본문에서 이야기되듯 아역 시절부터 계속 영화를 찍어온 배우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맡는 배역의 폭들이 넓은 편이기도 했다. 웃기고 어리숙한 캐릭터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지적인 캐릭터, 심지어는 2010년에 히트한 모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보다도 더 오래 전에 까도남같은 역도 했을 정도(《그대 안의 블루). 이 외에 안성기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수없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왕초를 맡아 화제를 받았던 고래사냥의 민우역, 비리 경찰 역할을 맡은 투캅스의 조 형사역, 역대급 정조를 평가받는 영원한 제국의 정조역, 냉혹한 악역 보스 역할을 맡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장성민역, 실미도를 이끄는 대장 역의 최재헌 준위역, 사고뭉치 가수를 케어하는 매니저를 맡은 라디오 스타의 박민수역 등이 있다. 다만 배창호, 이장호 감독의 전성기가 끝난 후로 여러 감독들과 작업했는데, 이미 한국 영화의 간판이던 안성기는 캐스팅 제의를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함량 미달의 작품에도 얼굴을 팔아서 배우로서의 아우라를 많이 잃었다는 평가가 있다. 덕분에 인간으로서의 흑역사는 없는데 괴작이나 졸작을 거절 못해서 배우로서의 흑역사만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기억에 남는 게 안성기뿐이다 할 정도로 그 능력이나 지위가 확고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TV 드라마 출연이 극히 드물다. 이름 없던 시절 수사극 드라마에서 범인 역으로 나온 다든지 몇번 TV에 나온 적이 있긴 하다. 이는 안성기가 성인 배우로 다시 복귀하던 시절부터 한국 영화로 불리며 는 컬러 TV 보급 등의 영향으로 긴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영화판에서 새로 건진 배우가 있어도 곧 TV 탤런트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영화 최고 스타인 안성기로서는 자신 만은 한국 영화를 위해 TV 드라마 출연을 자제하겠다고 맘먹고 그에 따른 것이다. 위의 흑역사라고 불리는 영화에 출연하는 것도 한국 영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역할이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연기력 또한 원래 뛰어나지만 시대가 변해도 그에 침체되지 않는 배우다. 90년대의 흥행 배우들 대부분이 2000년대에 넘어오면서 자연스럽지 못한 억양에 침체되는 반면에 그는 안성기라는 개성을 지키면서도 시대에 어울리는 억양을 쓴다.

2016년 6월 런닝맨을 통해 처음으로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기타

영화 《실미도》에서는 안성기가 실제로 장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반영되어 684부대장(공군 준위) 역을 받았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전 회장이었던 박삼구 금호문화재단 이사장과 함께 금호문화재단의 이사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문화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장교로 복무할 당시 선배 장교들의 조언을 받아 처음 저녁 점호 때 무작위로 병사들의 총기 하나 잡고 살짝 녹슨 자국을 트집잡아 내무반 분위기를 박살내 군기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분 성격이 어디 안가는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이 안성기의 유한 성격을 눈치채고 구슬려 온갖 꿀을 빨았다고 한다.

아역 시절에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특별상을 받았는데, 이게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 영화제 연기자 수상 기록이다.

MBC 《인간시대》에서 단란한 가정을 보여주었고 안성기는 그 다큐 최초로 나온 연예인이었다. 이후 무명에서 막 뜨기 시작한 최진실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유명인이 자신이 삶을 진솔하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는 평. 이후에도 큰 스캔들이 없어서 그때의 인상이 남아있었고 다른 배우들과 달리 TV 출연이나 다작 CF도 없어서 상대적으로 성실함과 신비감을 유지했다.

대한민국 가요계의 제왕 조용필과 경동중학교 동창이다. 실제 학생시절부터 알고 지냈다고 한다. 한 명은 영화계를 평정한 국민배우, 한 명은 가요계를 평정한 국민가수.

그리고 영화배우로 있는 동안 박중훈과 콤비를 이뤘는데 첫 콤비는 《칠수와 만수》로 시작하여 《투캅스》 시리즈,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라디오 스타》 등 상당히 많은 작품에서 콤비를 이루었다. 이제 안성기에게 박중훈은 사실상의 절친이며 박중훈은 데뷔초부터 지금까지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항상 안성기를 꼽는다. 특히 그의 인격적으로 변하지 않는 모습에서 완성된 인격을 느끼기 때문에 자신이 항상 감동을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방송에서 나오는 모습과 실생활의 차이가 없고, 실제로 볼 때 카리스마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성격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잘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하고, 후배들에 대한 배려도 잘 하기 때문에 실제로 안성기와 함께 촬영을 해본 다른 후배들이 단순히 선배 배우로가 아니라 인격자로서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안성기가 출연하던 영화에서 그와 개인적 친분이 전혀 없었으나 나이가 조금 있던 무명 단역 배우가 촬영장에서 짧은 연기를 하다 자꾸 실수를 했을때 화가 난 감독이 그 쉬운것도 못하냐며 욕을 섞어가며 심각하게 모욕적인 말을 하자 안성기가 직접 나서서 그 상황을 무마시키고, 그 단역 배우를 잠시 따로 데려가서 “신경쓰지 마라. 당신은 틀림없이 할 수 있다는 걸 믿어라.”라며 위로하고 촬영을 잘 마치게 하여 그 배우가 크게 감동받아 후에 영화관계자들에게 당시 안성기에게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는 이야기를 하여 영화계 미담이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연기폭이 다양한 반면 베드신은 못 찍는다고 한다. 일설에는 천주교인이라거나 혹은 아내나 아들 보기 민망해서라고 하는데 그 이야기가 오인돼서 안성기는 영화에서 벗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로 발전했었다. 사실 안성기는 필요할 때면 얼마든지 영화에서 벗는다. 80년대 출연한 영화에서 베드신이 등장하는 영화가 꽤 있었으며, 이후 출연작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모 토크쇼에서 고백한 바에 의하면 이런 저런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연기 인생이 오래 돼도 베드신은 감정 이입이 안 되어서 찍지 않는다고. 그래서 《깊고 푸른 밤》 등에서 나온 장면은 많은 부분 대역을 썼다고 한다. 또 외모의 영향도 있다고 밝힌적 있다. 무엇보다 애처가인 영향이 크다. 아내를 위하는 마음이 엄청나서, 영화 《꿈》에서 황신혜를 겁탈하는 씬이 있었는데 아내에게 너무 미안해서 한동안 아내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박중훈이 과거에 한 인터뷰에 의하면, 안성기는 꿈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유혹하자 꿈에서라도 아내를 배신할 수 없어서 억지로 잠에서 깼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아내에 대한 엄청난 충실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96년 영화주간지 씨네21에서 안성기에 대해 여론조사를 했었는데, 그를 싫어한다는 이유들 중 하나가 아내에게 너무 잘해줘서라고 한다.

2001년 영화 ‘무사’로 제22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생애 첫 남우조연상 수상인데, 그 동안 주연급 배우로서 활동하면서 주연상만 독식해오다가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포지션까지 양보하면서 영화를 위해 많이 고생한 노고가 인정되었다. 그의 수상호명과 함께 그 영화제에 참석한 모든 배우, 제작자들이 객석에서 기립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청룡상 영화제의 몇 안되는 명 장면이기도..당시 이 영화 촬영 때 참여하던 이가 나중에 다른 사업을 하여 대박을 거둬 책도 냈는데 무사 촬영 에피소드에 대한 회고를 한 바 있다. 중국 사막에서 촬영당시, 배우들이 시원한 찬 음료를 요구하는데 사막이다보니 찬 음료가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미지근한 음료를 주자 다들 화내고 짜증냈다고 한다. 반면에 안성기만은 미지근한 물에 차를 타서 아무렇지 않게 마시며 “왜 그래? 미지근해도 목마르지 않으면 되잖아. 오히려 이런 사막에서 마시는 것 부족할 거 없이 준비한 게 잘한거지.” 라며 당시 스텝들에게 이렇게라도 준비해서 수고했다는 말을 해서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서 후원 활동을 하고 있으며, 유니세프와 관련된 여려 활동을 했다. 대표적으로 롯데 자이언츠 홈구장인 사직구장에서 시구를 했었으며, 2014년 8월 12일에는 한국유니세프 20주년을 기념하여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출연하여 홍보하였다. 영상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기념곡 <코이노니아> 뮤직비디오 제작에 큰 공헌을 하였고, 교황 방한 마지막날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에서 독서를 봉독하였다.

팝음악을 좋아하고 엠넷에 출연해서 좋아하는 팝음악을 소개한 적 있다, 샤데이를 소개할 정도로 팝음악에 조예가 있다.

얼굴 자체는 잘생긴게 맞는데 이목구비가 은근히 요상하다. 분장에 따라서는 진짜 이상한 얼굴로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위의 사진을 꼽을 수 있다. 안성기가 맡은 성공시대의 주인공 김판촉이 마지막에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자신이 성공하는 망상을 하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홍콩 영화배우 양조위와 닮았다. 특히 웃는 모습이 가장 닮았다.# 안성기 본인도 묵공 촬영 당시, 유덕화에게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키가 크다. 고령에도 불구, 175cm의 훤칠한 비율과 카리스마 있는 외모로 미노년 테크를 타고 있다.

2021년 6월 28일 키즈유튜브인 ODG에 출연해서 당시 초4, 초6, 중2 학생들과 같이 본인의 역대 연기 장면들을 보며, 자신의 연기인생을 초4, 초6, 중2 학생들과 같이 리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술했듯이 건강이상설이 돌고 있었고 근황이 뜸하다가, 오랜만에 모습을 비췄던 것인데, 그런 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목소리에 많이 힘이 빠져 있고, 그의 인상에서도 세월의 흔적이 많이 지났음을 보여주었다. 영상 댓글의 대부분이 반갑지만, 어릴적 그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목소리가 많이 죽은 듯한 모습에 세월의 무상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는 댓글들이 많았다. 해당 영상

2024년 갑진년 용띠 해를 맞이해 용띠 배우들의 활약이 기대된다고 1952년생 72세 용띠 배우 중에서 대표적인 배우인 안성기를 꼽았지만, 실제로 안성기는 호적상만 1952년생이지, 실제로는 1951년생이고, 그것도 1월 5일생이라 범띠이다.

건강 관련

2020년 10월 20일쯤에 건강이상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당초 건강에 문제가 있어 언론 인터뷰나 행사는 진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연기 활동을 하며 ‘국민배우’라는 칭호도 얻고 특히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이미지로 한결 같은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왔기에 건강 이상 소식은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그러나 2021년부터 영화 출연을 지속하고 있기에, 건강은 나아진 모양이다.

21년 12월 12일에 서울의 봄(영화) 시나리오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고 건강이 양호하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결국 불발되었다.

하지만, 현재 2022년에 공개된 안성기 배우의 근황 사진을 보면 건강이상설이 의심될만큼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인다는 여론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언론매체에 등장했을 때 병세로 인해 상당히 부어 있는 얼굴이 보여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2022년 9월 15일 서울 강남구 CGV 압구정에서 열린 배창호 감독의 40주년 기념 ‘배창호 감독 특별전’ 개막식에 참석하며 오래간만에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배우 김희라, 김보연과 함께 관객들 앞에 선 안성기는 다소 부은 얼굴과 쉰 목소리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영상 뉴스 기사의 사진을 보면 기사에 안성기라고 안적혀있으면 과연 그가 맞나 싶을 정도로 병색이 완연한 모습을 보이며 우려를 자아냈다. 병마로 인한 급격한 탈모가 진행됐는지 가발을 쓴듯한 어색한 헤어스타일도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안성기 측에서는 건강한 상태라며, 이상이 있다면 공식석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건강 이상설을 부인했다.

그러나 다음날 조선일보 단독 인터뷰를 통해 안성기가 2019년부터 1년 넘게 혈액암을 투병중인 사실과 항암 치료로 인한 탈모로 가발을 착용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투병중인 사실은 처음 알려진 것이며 최근 무대인사나 촬영에 임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로써 밝혀졌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항암치료로 민머리가 된) 이 머리로 작업을 할 수는 없고, 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2022년 9월 인터뷰365 김두호와의 단독 인터뷰

2023년 2월 23일 인터뷰를 통해 많이 호전된 근황을 전하며 아직 정해진 후속작은 없다면서도 복귀 의지를 드러냈다.

2023년 6월 29일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에 박중훈, 최민식과 함께 참석했다. 이 날, 그는 다행히 많이 호전된 모습으로 등장해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따스한 미소를 띄며 근황을 알렸다. 또한, SNS 상에서 위 3명이 나란히 등장하며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이 한국 영화계 레전드들의 등장이라는 제목으로 상당히 많은 화제가 되었다.

기부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2021년 10월 20일 서울성모병원에 1억원을 기부했다.

기부를 하며 아래와 같은 첨언을 하였다.

“혈액내과 조석구 박사가 주치의인데 일단 위기를 넘기고 난 뒤 주변의 불우한 환자들이 친구처럼 다가왔다. 같은 처지의 환자로 치료비가 부족한 분들에게 써주기를 바라면서 내 작은 정성을 보태고 싶었다.”

이름 관련 각종 에피소드들

아무래도 이름이 이름이다 보니 각종 개드립 및 섹드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가끔 ‘영화배우 A 성기 사진 (공개)’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놓고 안(Ahn)성기 사진을 올려놓는 낚시를 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에도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신문 유머란에는 이름이 섹드립으로도 유용되는 등 여러모로 굴욕을 겪었다. ‘한국 영화는 성기를 보여줘야 히트한다’는 식으로. 사실 이미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90년대에도 일밤에서 개그맨 김형곤이 진행하던 스타 청문회라는 코너에 나와서 굴욕의 인증을 한 바 있다. 김형곤이 질문을 하면 “네/아니오”로만 대답을 해야 했는데 “본명이 안성기 씨 맞죠?”라고 하면서 “어릴 때 성기라는 이름으로 놀림받은 적이 있죠?”라고 하자 안성기가 머쓱한 웃음으로 “네”라고 스스로 말했었다. 그리고 김형곤은 폭소클럽 145회에서 카우치 사건 때 이를 한번 더 써먹었다(…).

이름 관련으로 또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모 토크쇼에서도 이름 관련으로 질문을 받았는데 본인 曰 : “제 성씨가 안씨라서 참 다행이에요. 강씨였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두시탈출 컬투쇼에서도 영화 《페어러브》 때문에 이하나와 같이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김태균이 “이하나씨는 이 하나로 연기하느라 힘들다”라는 말을 하자, 정찬우가 “그럼 안성기씨는 그게 없이 한다는 소린데…”라는 개드립을 날린 바 있다.

김사랑, 인사도 사랑스럽게라는 오센 기사에 어느 네이트 이용자가 김사랑이 인사도 사랑스럽게 하면 안성기는 인사도 X같이 하냐?라는 댓글을 올렸다. # 네이트 뉴스에서 댓글을 다른 순서로 정렬할 수 있었던 시절에는 주목도 순에서 최고점을 달리기도 했다.

가족관계

아버지들, 형제들, 사촌에 조카들까지 집안 대대로 딸이 매우 귀한 아들부잣집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4남 1녀 중 둘째고 큰집은 아들만 5명, 본인 형제는 아들만 3명, 작은집들도 아들 여럿에 딸이 하나씩이라고 한다. 형제들 중에서도 큰형 안인기 PD만 1남 1녀를 뒀고 작은형의 자식들은 모두 아들이며, 본인도 이 징크스를 피해가지 못하고 아들만 둘 두었다. 스스로도 결혼 후에 어느 정도 결과를 예상했다고 한다.

부인 오소영은 이화여자대학교 조소과 출신 조각가 겸 교수이다. 참고로 안성기는 직접 부인의 전시회장에서 작품을 나르기도 할 정도로 자상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상당한 미인으로, 미남인 아들들 외모는 상당 부분 엄마 덕인 듯. 참고로 위의 《인간시대》에 출연했을때가 장남인 안다빈을 임신했을 때였다.

여담으로 40대 이상의 많은 사람들은 안성기와 커피광고에서 오랫동안 부부 역할로 같이 출연했던 이현미를 실제 부인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무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커피 광고에서 부부로 출연하면서 워낙 케미가 좋기도 했지만 이현미는 직업 모델이 아니라 일반인이어서 커피 광고 외에는 전혀 볼 수 없는 인물이었기에 그런 인식이 많이 생겨난 듯 싶다. 유튜브나 인터넷 동영상에서 검색해보면 당시 CF 몇 개를 볼 수 있는데 이현미의 미모 자체가 대단하기도 하고 특유의 단아하고 선한 인상이 안성기와 아주 잘 어울려서 부부라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장남인 안다빈은 프랫 인스티튜트 출신으로 회화를 전공했다. 여담으로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난 이정재와 정우성을 개인전에 초대해서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싶었다며 찍은 사진이 있다.

작풍은 에곤 쉴레나 클림트가 생각나는 그런 그림. 2010년대 초반에는 규현과 서로 쌍둥이인가 싶을 정도로 닮아서 한때 화제가 됐었다. # 심지어 나이도 둘 다 빠른 88.

둘째 아들 이름이 안필립인데, 1992년 로드쇼와 인터뷰에서 안창호 선생 아들 이름에서 따왔다고 밝힌 바 있다. 안필립은 시카고 예술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안성기 본인은 육군 ROTC 출신이지만 두 아들은 모두 공군에서 현역병으로 복무했다. 기묘하게도 두 명 모두 공군교육사령부에서 복무를 했다. 장남은 진주 공군교육사령부에서 천주교 군종병으로 복무했고, 차남은 공군행정학교 총무병으로 복무했다.

처이종사촌은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우상호이고, 처숙부는 원로배우 박병호다.

영화

황혼열차(1957)

하녀(1960) – 동식의 아들

월급쟁이(1962) – 철이

얄개전(1965) – 두수 역

소령 강재구(1966)

젊은 느티나무(1968)

바람불어 좋은 날(1980) – 덕배 역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 큰아들 영수 역

만다라(1981) – 법운 역

어둠의 자식들(1981)

철인들(1981)

적도의 꽃(1982) – 미스터 M 역

풀잎처럼 눕다 (1983)

안개마을(1983) – 깨철역

꼬방동네 사람들(1982) – 태섭 역

고래사냥(1984) – 민우 역

무릎과 무릎사이(1984) – 조빈 역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어우동(1985)

깊고 푸른 밤(1985) – 백호빈 역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 – 손병호 감독 역

겨울나그네(1986)

내시(1986)

황진이(1986)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 – 영민 역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 – 병태 역

달빛 사냥꾼 (1987) – 정호 역

칠수와 만수(1988) – 만수 역

성공시대(1988) – 유미사 직원 김판촉 역

개그맨(1989) – 이종세 역

남부군(1990) – 빨치산 이태 역

꿈(1990) – 신라시대 스님 조신 역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 최종수 역

베를린 리포트(1991) – 성민 역

천국의 계단(1992) – 김영균 역

그대 안의 블루(1992) – 디스플레이 디자이너 호석 역

하얀전쟁(1992) – 한기주 역

투캅스(1993) – 조형사 역

태백산맥(1994) – 김범우 역

그 섬에 가고 싶다(1994) – 김철 역

영원한 제국(1995) – 정조 역

남자는 괴로워(1995) – 안 과장 역

말미잘(1995) – 최 선장 역

잠자는 남자(1995) – 잠자는 남자(대사 하나없이 정말 잠만 잔다…)역. 일본 영화

천재 선언(1995) – 이상한 빛 역

헤어드레서(1995) – 앙리 박 역

축제(1996) – 이준섭 역

박봉곤 가출사건(1996) – X 역

이방인(1998) – 김 역

퇴마록(1998) – 박신부 역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 – 명성기 역

미술관 옆 동물원(1998) – 인공 역

아름다운 시절(1998) – 최 씨 역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 살인범 장성민 역

구멍(2000) – 나 역

킬리만자로(2000) – 번개 형님 역

진실게임(2000) – 조검사 역

무사(2001) – 무사 진립 역

마리 이야기(애니메이션)(2002) – 경민 역(목소리)

취화선(2002) – 김병문 역

피아노 치는 대통령(2002) – 대통령 역

실미도(2003) – 최재현 준위 역

아라한 장풍 대작전(2004) – 자운 도사 역

형사 DUELIST(2005) – 안포교 역

묵공(2006) – 항엄중 장군 역. 한,중,일 합작 영화

한반도(영화)(2006) – 대통령 역

라디오스타(2006) – 매니저 박민수 역

화려한 휴가(2007) – 박흥수 사장 역

마이 뉴 파트너(2007) – 강민호 역

신기전(2008) – 세종대왕 역

페어러브(2010) – 형만 역

7광구(2011) – 캡틴 안정만 역

부러진 화살(2012) – 김경호 교수 역

타워(2012) – 여의도 소방서장 역

페이스 메이커(2012) – 박성길 코치역

톱스타(2013) – (특별출연) 김경민 역

찌라시 : 위험한 소문(2014) – (특별출연) 국회의원 역

신의 한 수(2014) – 주님 역

화장(2014) – 오정석 역

제7기사단(2015) – 어거스트 역

사냥(2016) – 문기성 역

사자(2019) – 안신부 역

종이꽃(2020) – 윤성길 역

아들의 이름으로(2021) – 오채근 역

카시오페아(2022) – 인우 역

한산: 용의 출현(2022) – 어영담 역

탄생(2022) –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역

노량: 죽음의 바다(2023) – (특별출연) 어영담 역

교양

한반도의 매머드(EBS) – 내레이션

음악

2020 트롯 어워즈(TV조선) – 출연

광고

동서식품 – 맥스웰 & 맥심(커피) & 프리마.

한국인삼공사 – 정관장

삼성전자 – 애니콜, 콤보, 매직스테이션, 파브

KTF

롯데건설 – 롯데캐슬

LG전자 – 와인폰3

유니세프

현대중공업

하나은행

르노삼성자동차 – SM5, SM7

매일매일 더욱더! DS 두뇌 트레이닝

수상 내역

2023 제43회 황금촬영상 배우부문 공로상

2023 제10회 들꽃영화상 공로상

2022 제58회 대종상 공로상

2022 제4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공로상

2021 제29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영화부문 대상

2021 시카고 인디영화제 남우주연상

2020 제53회 휴스턴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

2019 제10회 올해의 영화상 특별공로상

2015 제4회 스타의밤 대한민국톱스타상 공로상

2015 제3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특별감사패

2015 제35회 황금촬영상 인기남우상

2014 제4회 협성사회공헌상 교육문화 부문

2013 제4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문화훈장(은관문화훈장)

2013 제49회 백상예술대상 사회공헌상

2012 제3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2012 제4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2011 환경재단 9주년 후원의밤 그린산타상

2011 제33회 황금촬영상 시상식 공로상

2011 제6회 페르노리카 코리아 로얄살루트 마크 오브 리스펙트

2011 제6회 로얄살루트 마크 오브 리스펙트

2011 한국스카우트연맹 전국리더스게더링 무궁화금장

2008 제13회 닛케이 아시아상 문화부문

2007 제44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2007 제6회 한국예술발전상 영화부문

2006 제2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2006 제27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2006 제43회 대종상 데뷔 50주년 기념상

2005 문화관광부 보관문화훈장

2001 제22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1996 제1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1995 제15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1995 제33회 대종상 남자인기상

1994 제14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1994 제3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

1994 제3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1994 제32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1994 제32회 대종상 남자인기상

1994 제32회 대종상 사회공헌상

1993 제31회 대종상 남자인기상

1992 제13회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1992 제38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남우주연상

1991 제27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1991 제29회 대종상 남자인기상

1990 제11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1990 제11회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1989 제2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1987 제32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남우주연상

1986 제2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인기상

1985 제21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1985 제24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1984 제2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1983 제22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1983 제4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1983 제1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1982 제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1982 제1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1982 제21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1980 제19회 대종상 신인상

1959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

한국 3대 영화상인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한 배우이며, 심지어 백상예술대상과 대종상은 역대 남우주연상 최다 수상 배우이다. (백상 8회, 대종상 5회)

또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을 4년 연속(82~85) 수상했으며,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82, 83년도에 2년 연속 수상, 이후 85년도에 한 번 더 수상하며 4년 동안 남우주연상을 총 7회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1994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에서는 대상과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그의 최전성기였던 80년대에는 청룡영화상이 폐지되어 있었던 터라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기록이 상대적으로 적지만 90년도 청룡영화상이 부활한 첫 해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데에 성공했다.

뿐만아니라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걸쳐 주연상을 수상한 유일한 배우로, 그의 첫 남우주연상과 그의 마지막 남우주연상은 각각 1982년과 2012년으로 무려 30년의 시간 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