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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의 차이에 대하여 (feat. 전우용)

감수성의 차이에 대하여 (feat. 전우용)

내용

작년 모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강연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마고 답했더니 다음날 실무자가 필요한 서류에 대해 안내하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력서와 통장사본 외에 <성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에 사인해 보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순간 심한 모욕감과 불쾌감이 치밀었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성범죄 경력자로 의심하면서 강연 부탁은 왜 해?” 등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모욕감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답 메일을 보냈습니다. “저를 성범죄 경력자로 의심하는 기관에서는 강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실무자가 전화를 했습니다. 그는 “이미 홍보가 다 됐는데, 이제 와서 취소하면 어떡하느냐”고 질책했습니다. 저는 따져 물었습니다. “내가 아동이나 청소년 관련 기관에 취업하려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중을 상대로 한 차례 강연하는 것뿐인데, 거기에 <성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가 왜 필요하냐? 그냥 < 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라도 납득할 수 있다. 사기 범죄 경력은 왜 조회 안 하느냐? 다중을 상대로 하는 강연에서는 그게 더 문제 아니냐? 남녀 관계없이 <동의서>를 써야 하는 거냐? 남자만 쓰는 거냐? 이게 과거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에서 했던 <신원조회>와 똑같은 거 아니냐? 6.25 때 행방불명된 친척이 있으면 무조건 ‘사상범 용의자’ 취급하던 것과 남자라면 무조건 ‘성범죄 용의자’ 취급하는 게 뭐가 다르냐? 차라리 당사자에게 통보하지 않고 알아서 조사하던 독재정권 시절 방식이 덜 모욕적이다.” 등등. 하지만 여성 실무자는 “규정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는 제가 느낀 모욕감에 공감하기는커녕, 이해하려는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성범죄 전력이 없으면 그만이지 그까짓 거 써 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라는 생각이 그의 말투를 통해 그대로 전달됐습니다. 끝까지 거부했다간 ‘성범죄 전력이 있어 강연을 포기했다’는 소문이 날까 두려워 결국 써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헛소문’이 두려워 원치 않는 일을 했다는 굴욕감이 추가됐습니다. 이 뒤로도 이런 일은 되풀이됐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항의가 많았기 때문인지 최근에는 <성범죄 및 아동 상대 범죄 경력 조회 동의서>로 바뀌었더군요. 물론 여자들이 모욕감을 느끼는 상황은 더 많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 모욕감을 느끼지 않는 남자들도 아마 있을 거고요.

역시 꽤 오래전, 아내와 함께 길을 걷다가 공중화장실 앞에서 바지 지퍼를 올리지 않은 채 나오는 늙수그레한 남자를 봤습니다. 아내가 “저 사람 변태 아냐?”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칠칠치 못해서 그래. 나도 저럴 때 있어.”라고 말했다가 등짝을 한 대 얻어맞았습니다. “조심해. 변태로 오해받아.” 30년을 함께 살았지만, 이런 문제에서는 아내와 저 사이에 ‘감수성’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는 ‘실수’라고 보는 것을 아내는 ‘고의’라고 판단합니다. 저는 ‘본인의 망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처는 ‘타인에 대한 가해’라고 인식합니다. 이 경우 제 처는 ‘성적 불쾌감’이라는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그 남자를 ‘가해자’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피해를 입었다고 느낀’ 사람이 있다는 것과, ‘가해자’를 확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요즘 ‘성인지감수성’이라는 말이 흔히 쓰이는데, 용어가 어려운 것도 문제지만 사용되는 방식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성인지 감수성’은 그냥 ‘이성에 대한 배려심’ 또는 ‘역지사지’라고 해도 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은 ‘감수성의 획일화’를 강요하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나란히 앉아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한 사람은 손수건을 짜는데, 옆 사람은 덤덤히 앉아 있기도 합니다. 한 사람은 무섭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옆 사람은 웃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과 눈만 마주쳐도 자기를 째려봤다고 흥분하는 양아치가 있는가 하면, 만원 지하철에서 부딪힌 걸 성추행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같은 자극에도 다르게 반응하며, 다르게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소탈함’의 상징으로 느끼는 걸, 다른 사람은 ‘추잡함’의 상징으로 느낍니다. 사람은 심지어 같은 물건에 대해서도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아이돌 스타가 입은 속옷과 늙은이가 입은 속옷은 느낌상 다른 물건입니다. ‘감수성’은 획일화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감수성의 차이가, 같은 자극에도 다르게 반응하는 ‘인간다움’의 본령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가족 사이라 해도 ‘감수성의 일치’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더 배려하고 더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인류는 이제껏 ‘올바른 신앙심’, ‘올바른 애국심’, ‘올바른 사상’, ‘올바른 태도’라는 미명 하에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올바름을 과신하여 타인의 죽음까지 조롱하는 태도야말로, ‘올바름’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물론 ‘감수성의 차이’를 무한정 용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매너’와 ‘의례’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질 테니까요. 그래서 사회적, 법률적, 의학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성 관련 담론이 급팽창하고 세대 차이까지 겹쳐지는 상황에서 그 기준은 계속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의학적으로 병적인지 아닌지’, 또는 김재련씨가 말한 대로 ‘법률적으로 죄가 되는지 아닌지’를 점검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행위가 일단 병적이거나 범죄적 행위로 규정된다고 해서 그 기준이 항구적인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도 ‘감수성’ 차이로 인한 오해와 갈등, 법적 다툼은 계속 늘어날 겁니다. 용인되는 것과 용인되지 않는 것들에 관해 새로운 기준이 만들어지고 정착했다가 다시 바뀌는 과정이 반복되겠죠. 하지만 이 과정이 ‘인도주의’에 위배되지 않게 하려면 ‘감수성은 결코 획일화할 수 없다’와 ‘범죄여부의 기준도 민주적으로 세워야 한다“ 등의 원칙은 세워야 할 겁니다. 몇 사람의 느낌, 혹은 ’느낌에 대한 기억‘이 단일 기준이 되는 사회는 결코 ’인간의 사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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