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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프로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프로필 (팝의 황제)

이름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본명마이클 조셉 잭슨
Michael Joseph Jackson
출생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 주 게리
사망2009년 6월 25일 (향년 50세)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홈비 힐스
국적미국
직업가수,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사업가
부모님아버지 조셉 잭슨, 어머니 캐서린 잭슨
형제7남 3녀 중 여덟째(6남)
 재키 잭슨
티토 잭슨
저메인 잭슨
말론 잭슨
브랜든 잭슨
누나 레비 잭슨
라토야 잭슨
남동생 랜디 잭슨
여동생 자넷 잭슨
배우자리사 마리 프레슬리(1994년 결혼 ~ 1996년 이혼, 2023년 사망)
데비 로우(1996년 결혼 ~ 1999년 이혼)
자녀프린스 잭슨, 패리스 잭슨, 비기 잭슨
묘소미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성별남성
인종흑인
신체175cm, 54kg
MBTIISFP
종교여호와의 증인 → 불명 (무종교 추정)
장르팝, 소울, 펑크, R&B, 록, 디스코, 포스트 디스코, 댄스 팝, 뉴 잭 스윙
그룹잭슨 파이브, 더 잭슨스
데뷔그룹 1968년 1월 31일 잭슨 5 싱글 〈Big Boy〉
솔로 1971년 10월 7일 싱글 〈Got to Be There〉
별명King of PopAppleheadMJSmelly마잭마이크The Gloved One

마이클 잭슨 공식 홈페이지

마이클 잭슨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michaeljackson

마이클 잭슨 X

마이클 잭슨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ichaeljackson

마이클 잭슨 유튜브

https://www.youtube.com/user/michaeljackson

위상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20세기 대중문화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자 변화로 평가되며, 단순히 음악계를 넘어 20세기의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한 명이다. 미국 팝 시장에서 흑인 가수의 비율이 높지 않았던 시절, 전 세계적 문제였던 인종차별을 음악을 통해 완화시키며 문화 예술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 이전까지 미국 팝시장의 주도권은 늘 백인 싱어에게 쥐어져 있었으나, 잭슨이 등장한 이후 최초로 미국 흑인이 가요 시장의 주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마이클 잭슨의 등장 이후,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는 록 음악에서 팝 / 알앤비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의 등장이 대중음악을 주름잡는 장르의 종류마저 변화시키게 된 것이다.

그의 압도적인 성적에 걸맞게, 마이클 잭슨은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업 수익을 남긴 아티스트중 하나이다. 전체 앨범 판매량은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뒤를 이은 3위이고, 단일 앨범 판매량은 압도적인 1위이다. 또한 마이클 잭슨은 생전과 사후 합쳐 약 800여개의 상을 수상하며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아티스트로 이름을 올렸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빌보드 핫 100 1위를 달성한 최초의 아티스트로 기록되어 있다.

마이클 잭슨은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사회 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는데, 금전적인 자선활동 외에 자신의 음악을 통해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메세지를 전달하였다. Heal the World, Black or White, Earth Song, We Are the World, What more can I give 등의 곡들이 대표적. 이러한 곡들을 통해 잭슨은 세계 평화, 친환경 운동, 전쟁 반대, 테러 반대 등의 메시지를 던졌다.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휴전국가인 대한민국에서도 공연을 가지며, 한국의 통일을 기원하고 실제 통일하면 공연하러 오겠다는 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이 날 공연에서 역시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가 담긴 퍼포먼스가 공연 중간에 등장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연예인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고, 20세기 큰 영향력을 지닌 아티스트로 평가받으며 이는 21세기까지 현재진행형이다. 또한 그는 팝 역사상 가장 많은 기부를 한 인물이기도 했다.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등장은 하나의 사회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의 앨범 Thriller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되었고 We Are the World, Heal the World와 같은 음악 활동과 기부로 박애주의적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Bad, Dangerous 등을 성공시키며 대중에게 전례 없는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199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대중문화의 세계화에 처음 등장한 서구 문화의 상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잭슨은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으며 대중가수로서는 최초로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부터 성추문 루머로 인해 언론들에게 완전히 먹잇감이 되어 버렸고 그를 정신이상자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며,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언론의 매도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05년 2차 아동 성추문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그는 대부분의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몇 년간 칩거 아닌 칩거를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으며 사실상 정상적인 활동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러던 2009년 3월, 마이클 잭슨은 4년만에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런던에서의 콘서트 투어 계획을 발표하며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같은 해 7월부터 런던에서의 콘서트를 시작으로 활동 재개가 눈 앞에 왔지만, 6월 25일 주치의였던 콘레드 머레이의 프로포폴 과다 투여로 인한 심장마비로 향년 5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속되는 그에 대한 수많은 더러운 루머들은 그의 문화적 유산과는 별개로 그의 위상을 추락시켰으며, 전문가들은 그의 이름이 음악사에서 잊힐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행적에서 발견되는 여러 선행에 따라 재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대중음악의 영원한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영향력

영국 퀸 메리 런던 대학교 및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연구팀이 17,000개의 빌보드 핫 100에 오른 곡들을 분석한 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비틀즈, 롤링 스톤스를 중심으로 한 브리티시 인베이전) 1983년(마이클 잭슨, 더 폴리스, 유리스믹스 등의 팝스타와 신기술의 유행) 1991년(힙합의 황금기) 3차례의 혁명기를 맞았다고 한다. 1983년은 마이클 잭슨이 Thriller 앨범으로 차트를 완전히 휩쓸던 시기로 당시 타임지는 마이클을 비틀즈 이후 가장 거대하며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가장 인기있는 단일현상이라고 보도했고 롤링 스톤은 1977년 디스코 열풍 이후 대중음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설명하고 마이클 잭슨을 흑백 인종의 벽을 부순흑인인가수라 평가했다. 2013년 네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오늘날의 뮤지션들에게 가장 많이 영향을 주는 1980년대 뮤지션으로 미국인들의 61%가 마이클을 1위로 뽑았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기존의 미국 흑인 음악 스타일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흑인이라면 마땅히 소울이나 진한 펑크 음악을 해야 하며 록은 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의 고정관념이었다. 허나 뉴욕 타임스의 당시 칼럼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록인지 펑크(Funk)인지 아니면 디스코인지 한 가지로 딱 명확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독특한 음악이었다. 즉, 흑인 음악적 뿌리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백인들도 납득할 수 있는 음악을 들려주며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의 크로스오버로 새로운 사운드가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결국 대중음악사에서 전례없는 성공을 이끄는 계기가 된다. 고영탁 음악평론가는 ‘소울, 펑크, 재즈 등 대표적인 흑인음악과 록, 팝, 발라드 같은 백인음악이 그의 음악에 하나로 녹아있다. 말하자면 흑백 음악의 통합을 이뤄낸 것으로 전례없던 인종대화합의 음악’이라고 평했고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는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대중음악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 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마이클의 음악은 당시 공공연하게 남아 있었던 인종적 취향의 벽을 아울렀다는 의미에서 ‘뉴팝’이라고도 불렸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영국 음악의 영향력에 억눌려 있던 미국의 음악이 다시 주도권을 탈환하고 세계 대중음악을 선도하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으며 동시에 록의 시대에서 팝의 시대로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마이클 잭슨이 헤비메탈에서 팝메탈로 발전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는 임진모의 평가는 전후가 잘못되었다. 팝메탈은 따져보면 그 뿌리가 하드 록이었는데 하드 록의 전성기는 70년대였고 정작 헤비메탈은 마이클 잭슨이 활동하던 80년대가 전성기였다. 임진모의 평가는 아직 정립되지도 않은 장르가 시작도 전에 시들해졌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마이클 잭슨은 록의 사운드를 팝에 접목하는 시도를 했고, 이 시도를 통해서 파워 팝이 발전하게 되었다.

시대가 이전보다는 좋아졌다고 하지만 1980년대는 인종차별이 여전히 극심한 시절로 많은 언론 권력들이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외면했다. 데이비드 보위는 1983년에 진행한 MTV와의 인터뷰에서 대놓고 MTV는 백인중심주의라고 비난할 정도이다. 1970년대 중반에 디스코 열풍으로 흑인 뮤지션들의 차트 진입이 활발한 적도 있었지만 1980년대에 열기가 식으면서 차트에서도 흑인 뮤지션들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마이클이 Thriller 앨범을 내기 전, 1981~1982년 2년간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한 흑인 뮤지션은 단 한 명도 없었고 hot 100 차트에서는 흑인 뮤지션의 곡은 단 4곡만이 1위를 차지했다. 빌보드는 아직 디스코 열풍이 한창이던 1979년과 비교했을 때 1982년까지 핫100 차트에서 흑인 뮤지션의 비중이 거의 80%나 감소했다며 당시 흑인음악의 존재감은 거의 바닥이었다고 분석했다. 디스코 열풍의 시기에도 물론 흑인 뮤지션들은 백인 뮤지션들에 밀려 주류로 대접받지는 못했다.

마이클 잭슨은 Off the Wall과 Thriller를 통하여 이 순환을 깨부쉈으며 근 20년간 대중음악계의 정상 자리에 올라 황제로 대접받았다. 롤링 스톤은 흑인 아티스트들의 출연을 거부했던 로큰롤 TV와 라디오 방송국의 굳게 닫혔던 문이 그에 의해 무너졌다며, 그 뒤로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평가했는데 특히 Billie Jean을 시작으로 수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큰 히트를 쳤다고 분석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이 80년대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최대의 음악 매체 MTV의 장벽을 돌파한 일이다. 1981년 뮤직 비디오 전문 방송사를 표방하며 개국한 MTV의 사장 밥 비트먼은 백인 로큰롤 위주로 음악 방송을 편성했고 이렇게 되니 대다수의 방송 구성에서 흑인은 거의 제외됐다. 비트먼은 ‘로큰롤’을 핑계로 흑인의 음악방송 출연을 거의 불허했던 것이다. 흑인들은 이런 MTV를 인종을 차별하고 있다며 거센 비난을 쏟았다. 그로 인해 마이클이 Billie Jean 뮤직 비디오를 제작했을 때도 MTV는 방영을 거부했다. 그러자 MTV에서 방영되는 대다수 백인 아티스트들의 소속사였던 CBS는 MTV에 잭슨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하지 않을 경우 모든 자사 소속 가수들을 MTV에서 빼버리겠으며 MTV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폭로하겠다고 통지했다. 결국 MTV는 이에 굴복하여 마이클의 노래와 뮤직 비디오를 방영했다. 거대 소속사가 흑인 가수를 위해 이렇게 움직였는데 흑인들이 자부심을 안 느낄 수가 있을까, 이후 MTV를 포함한 많은 언론 권력들이 마이클 잭슨의 거대한 영향력에 휩쓸려 흑인 대중음악가들을 더욱 더 많이 방송에 내보냈고 이로 인해 흑인 대중음악가들의 성공이 활발해졌다. 휘트니 휴스턴은 마이클이 흑인 아티스트들에게 길을 열어줬다며 감사를 표했다.

흑인의 음악이 백인 로큰롤 청자들에게도 뜻깊게 전달돼 미디어는 마이클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겨우 1980년대 초반에 마이클 잭슨은 앨범을 단 두 장만 발매했음에도 백인들의 스타인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정도로 화제였다.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사실로 흑인들은 잭슨을 영웅으로 생각했으며 1984년 타임지는 잭슨의 이름이 아프리카에 끼쳐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했을 정도이다. 이런 엄청난 영향으로 유색인 협회에서 상을 받았고 잭슨 사후 마틴 루터 킹 3세와 매직 존슨 등에게 흑인을 위해 많은 일을 해줘 감사하다는 애도를 받았다. 특히 흑인 인권 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는 타이거 우즈와 버락 오바마 이전에 흑인 뮤지션들이 세계 대중문화에 진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마이클 잭슨이며 덕분에 어릴 때부터 흑인 뮤지션들을 흉내 내며 자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흑인 대통령 오바마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마이클은 이전처럼 귀로만 음악을 듣고 만족하는 듣는 음악의 시대를 넘어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른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현대 팝 음악산업의 길을 제시했다. 마이클과 함께 음악의 중심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다. 뮤직 비디오와 댄스의 대중화와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고 획기적인 무대 장비와 연출을 선보였다. 빌보드는 “화려한 이미지와 무대효과 연출을 통해 잭슨은 라이브 무대 퍼포먼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힙합, 컨템포러리 R&B, 팝, 로큰롤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야의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사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라디오가 여전히 주요 음악 소비 매체 중 하나였고 지금에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음악을 영상과 함께 본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익숙지 않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MTV는 초기엔 그저 그런 케이블 채널로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좀비 소재를 이용해 최초로 13분짜리 단편영화 콘셉트를 차용해 제작된 마이클의 <Thriller> 뮤직 비디오가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MTV는 종일 마이클의 뮤직 비디오를 방영했고 덕분에 비로소 대중적으로 막강한 파급력을 가진 채널이 될 수 있었다.

영구보존작으로 선정돼 현재까지도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관 중인 유일한 뮤직 비디오이자 ‘MTV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직 비디오 1위, 또 제작 과정 등을 담은 필름 영상만 900만 부 이상 팔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뮤직 비디오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된 것이 바로 마이클의 <Thriller>이다. 빌보드는 <Thriller> 뮤비에 대해 “획기적인 시각 효과와, 스토리라인, 그리고 복잡한 춤 동작들로 뮤직비디오를 예술 형식으로 바꿔 놓았으며 이러한 독창적인 쇼트 필름의 충격은 뮤직 비디오의 예술성을 대중문화 속에 집어넣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이는 뮤직 비디오를 음반 산업 깊이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평가했다. 마이클의 이와 같은 대성공을 보고 다른 뮤지션들도 뮤직 비디오와 보는 음악의 위력을 실감하게 됐고 대중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것이다.

뉴욕 타임스의 존 파렐스 음악평론가가 마이클이 댄스 음악의 정의를 만들었다고 평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전엔 댄스 음악, 댄스 가수라는 수식어가 없다가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 바로 마이클과 함께였다. 잭슨 파이브 시절에는 로봇춤을 유행시켰고 이후 <Beat It>, <Thriller> 등 뮤직 비디오에서 환상적인 집단 군무를 선보여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문워크와 린댄스라는 획기적인 춤도 선보여 사람들에게 큰 문화충격을 선사했다. 이외에도 수백 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한 <Dangerous>의 안무 등 마이클은 참신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았다. 뉴욕 대학교 공연연구학 교수 타비야 녕오는 “프레드 아스테어 이후 그 어떤 댄서도 마이클 잭슨만큼 댄스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평가했을 정도. 이러한 공로들을 인정받아 마이클은 앞서 말한 프레드 아스테어와 같은 전설적인 댄서들이 이름을 올렸던 미국 국립 무용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2010년 헌액 됐는데, 이는 전문 댄서가 아닌 팝과 록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기록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처럼 춤을 추고 싶어 했고 제2의 마이클이 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댄서가 되기 위해 도전했다. 마이클 사후, 유명 댄서들은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단순히 멋진 춤을 췄다는 것만이 아닌 특수 연출을 통하여 시각적인 효과도 매우 많이 만들어냈다.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특히 Dangerous World Tour가 대중음악 공연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며 우리가 90년대 이후에 볼 수 있었던 대형 공연들의 특수효과 및 안무들은 바로 이 투어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들이라 해도 크게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대표적으로 공연의 시작과 함께 땅에서 튀어나오는 토스터 기법, Thriller를 부르고 끝부분에 관에 들어간 다음 관에 큰 송곳을 박아 넣고 불을 지른 다음에 전혀 다른 곳에서 다음 곡을 시작하는 것, Black or White의 끝부분에서 벽 밑에 깔리는 것, Earth Song 공연에서 뒤에 무대장치들과 탱크를 동원하여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점, Smooth Criminal 공연에서 등장하는 초대형 스크린 등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우 많은 기법을 사용하여 다양한 효과를 냈다.

마이클의 앨범은 사운드 엔지니어링 측면에서도 유행을 선도했다. 마이클은 사운드에 유난히 민감하고 엄격한 귀를 가졌던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마이클의 영원한 음악적 동지였던 사운드 엔지니어 브루스 스웨디언이 밝힌 일화에 의하면 마이클이 <Billie Jean> 사운드를 계속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무려 91번이나 믹싱을 반복해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들 때문인지 마이클의 앨범이 스피커나 플레이어 개발시에 단골 레퍼런스 디스크로 이름을 떨쳤다는 것은 레코딩 업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마이클의 음반을 믹싱, 마스터링했던 전문 스튜디오 엔지니어들이 이후 수많은 팝 아티스트들의 집중적인 주문 공세에 시달렸던 것은 물론이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도 “마이클의 앨범 사운드 자체가 굉장히 섬세하고 시대를 앞서가 옛 스튜디오 엔지니어들 책상에는 항상 마이클의 앨범이 꽂혀 있었을 정도”라고 말하며 “마이클의 음악을 들으면 녹음과 음향 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마이클은 앉아서 만족할 수 있는 사운드가 나올 때까지 계속 ‘다시’를 외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사운드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가 막히다. 특히 엔지니어들이라면 마이클의 음악은 반드시 들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마이클의 80년대 음악들은 약간 복고적인 느낌을 풍기는 곡들도 있긴 하지만 전형적인 80년대의 사운드와는 거리가 멀어 현대인들도 적응하기 좋고 특히 이준오 영화음악 감독이 아날로그 믹스의 바이블 같은 앨범이라고 칭하기도 한 1991년작 <Dangerous>부터는 사운드에 더더욱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나서 요즘 나온 음악처럼 세련되게 느껴질 수 있다.

ai 보컬이 등장한 후 많은 팬들이 여려 유명곡들을 마이클 잭슨 보컬로 편곡하면서 2020년대에서도 여전히 엄청난 영향력과 인기를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