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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프로필 (제36대 국무총리)

이해찬 프로필 (제36대 국무총리)

이름이해찬
李海瓚 | Lee Hae-chan
출생1952년 7월 10일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면 벽천리
사망2026년 1월 25일 (향년 73세)
베트남 호찌민시 떰아인 종합병원
거주지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51-4
본관전주 이씨
재임기간초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조순 시정)
1995년 7월 1일 ~ 1995년 12월 26일
제38대 교육부장관
1998년 3월 3일 ~ 1999년 5월 24일
제36대 국무총리
2004년 6월 30일 ~ 2006년 3월 15일
제21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2025년 11월 3일 ~ 2026년 1월 25일
부모아버지 이인용, 어머니 박양순
형제자매5남 2녀 중 다섯째
형 이해진 (1946년생)
형 이해명 (1948년생)
동생 이해만 (1957년생)
배우자김정옥
자녀딸 이현주
학력청양국민학교 (졸업)
덕수중학교 (졸업)
용산고등학교 (22회 / 졸업)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섬유공학 / 중퇴)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 / 학사)
병역병적제적 (수형)
종교무종교
신체166cm, 67kg, A형
최종 당적더불어민주당
의원 선수7
의원 대수13141516171920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제36대 국무총리.

약력

1971 용산고등학교 졸업 (22회)

1978 돌베개출판사 대표

1983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72 ~ 1985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학사)

1985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

1987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

1988 ~ 1992 제13대 국회의원 (초선 / 서울 관악구 을 / 평화민주당)

1988 평화민주당 원내부총무

1992 ~ 1995 제14대 국회의원 (재선 / 서울 관악구 을 / 민주당)

1992 민주당 당무기획실 실장

1995 초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 (조순 시정 / 차관급)

1996 새정치국민회의 총선기획단장

1996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

1996 ~ 2000 제15대 국회의원 (3선 / 서울 관악구 을 / 새정치국민회의)

1997 새정치국민회의 당무위원회 부의장

1998 ~ 1999 제38대 교육부장관 (국민의 정부)

2000 ~ 2004 제16대 국회의원 (4선 / 서울 관악구 을 / 새천년민주당)

2000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2000 ~ 2001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

2001 새천년민주당 서울특별시 지부 위원장

2003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 창당기획단장

2004 ~ 2008 제17대 국회의원 (5선 / 서울 관악구 을 / 열린우리당)

2004 열린우리당 국회개혁추진단 단장

2004 ~ 2006 제36대 국무총리 (참여정부)

2004 ~ 2007 열린우리당 상임고문

2006 ~ 2007 대통령비서실 정무특별보좌관 (참여정부 / 차관급)

2007 대통합민주신당 제17대 대통령 선거 경선후보 (경선 3위)

2007 ~ 2008 대통합민주신당 상임고문

2008 제3대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 회장

2009 시민주권 상임대표

2011 ~ 2012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2 ~ 2016 제19대 국회의원 (6선 / 세종특별자치시 / 민주통합당)

2012 제2대 민주통합당 대표

2012 민주정책연구원 이사장

2013 ~ 2014 민주당 상임고문

2014 ~ 2016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2015 ~ 2016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세종특별자치시당 위원장

2016 ~ 2020 제20대 국회의원 (7선 / 세종특별자치시 / 무소속)

2017 문재인 대통령 중국 특사

2018 ~ 2020 제3대 더불어민주당 대표

2018 ~ 2020 민주연구원 이사장

2019 더불어민주당 국회세종의사당추진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

2020 ~ 2026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2020 ~ 2026 동북아평화경제협회 이사장

2025 ~ 2026 제21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이재명 정부 / 부총리급)

여담

더불어민주당에서 역대 모든 정부와 계파를 불문하고 두루두루 존경받는 당내 원로이자, 민주당 역사의 산증인으로 꼽혔다. 심지어 자타 공인 친 김대중, 친 노무현, 친 문재인, 친 이재명으로 모두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이해찬도 김근태의 서울대 후배로서, 7~80년대 내내 김근태와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기에, 출신 정체성으로만 굳이 따지자면 김근태와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김대중 시대에는 동교동계 핵심 인사로 활동했고,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는 친노의 좌장이 되었고, 이후 친문이자 친명으로 꼽히며 늘 민주당의 주류 정치 흐름의 핵심을 이룬 인물인지라, 특정한 계파 정체성을 논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이해찬계’라는 것도 딱히 뚜렷하지 않다. 심지어 오랫동안 민주당의 핵심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수십년 동안 주요 선거 때마다 이해찬 본인이 직접 민주당으로 영입해 온 인재들까지 매우 많지만, 그 해당 인물들도 ‘이해찬계’가 아니라 각자 알아서 동교동계, 친노, 친문, 친명, 혹은 비주류 등으로 활동할 뿐이다. 즉, 이해찬은 그냥 ‘민주당의 이해찬’이었던 것.

생전 이해찬 정치 인생의 핵심만 대략적으로 정리해도 이러하다. 김대중은 평민당 총재 시절 이해찬을 영입하여, 오랜 야당 기간 동안 선거 전략 분야의 핵심 참모로 두었으며, 집권 후에는 교육부장관으로 임명하여 입각시켰다. 노무현에게 대선 출마를 권한 핵심 인물 중의 하나도 바로 이해찬이었는데, 결국 극적인 대선 승리를 진두지휘하며 ‘친노의 좌장’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제6공화국 수립 이후 실질적으로 최초의 책임 총리 역할을 수행했다. 자신보다 정치적으로 후배가 되는 문재인과 이재명의 대선 출마를 설득하고, 그들을 위한 핵심 멘토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바로 이해찬이었는데,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집권 여당의 당대표를 맡아 총선을 이끌며, 민주화 이후 최초의 총선 180석 획득이라는 대승을 거두었고, 이재명 정부 시절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임명되었다. 즉, 1987년 민주화 이후 네 차례의 민주 정부 탄생의 역사에는 이해찬이라는 이름이 늘 핵심적으로 언급되는 것이다.

민주당계 정당의 독보적인 ‘선거 전략가’로 유명했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 조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선거 전략을 총괄하면서, 탁월한 선거 캠페인을 통해 조순 후보를 당선으로 이끌며 거대 선거에서의 선거 기획 능력을 본격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덕에 만 43세에 정무부시장까지 지냈다. 그 후 크고 작은 선거에서 선거 전략에 관여하면서 많은 성과를 냈고, 특히 대선 후보 캠프의 핵심 지휘자 역할을 하면서 대통령을 무려 세 명이나 배출하여 ‘킹 메이커’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내각과 집권 여당의 핵심 요직을 두루 지냈다. 심지어 본인이 이재명의 정치적 멘토로서 활동하며 결국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켰으니, 지금까지 배출된 민주당계 정당의 대통령 네 사람이 전부 이해찬의 손을 거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론조사 분석을 가장 탁월하게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해찬과 가까운 김현, 최민희, 유시민 등의 증언에 의하면, 여론조사 자료 분석을 조사 전문가들 보다 더 잘했다고 한다. 심지어 현실 정치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시중에 발표되는 모든 여론조사의 통계표까지 모두 꼼꼼하게 다 챙겨보고, 자료 교차분석까지 했으며, 시중 언론의 보도는 물론이고, 실제 바닥 민심 파악을 위해 매일 주요 유튜브 방송 채널 컨텐츠와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최신 동향까지 챙겼다고.

노무현과는 시민사회 운동을 하면서 서로 알고는 있었지만, 1988년 총선 때 당선된 이후 함께 일하게 되면서 급격히 가까워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당시 비록 당적은 달랐지만, 같은 5공 청문특위 위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 노동위원회에서도 함께 활동하면서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당시 ‘노동위원회 3총사’로 불릴 정도로 어울려 다니면서, 함께 각종 노동 현안을 해결하며 성과를 내던 사람이 바로 노무현, 이해찬, 이상수 의원 셋이었는데, 이 세 사람의 인연이 훗날 참여정부 시기에 각각 대통령, 국무총리, 노동부장관으로까지 이어졌다. 참고로 당시 이해찬 의원실의 젊은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처음 국회에서 노무현과 만나 그의 인품에 매료되었던 인물이 바로 유시민이었다.

문재인을 정치계로 끌어들인 주인공이기도 하다. 노무현 前 대통령 사후에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정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설득한 사람이 이해찬이었던 것. 두 사람은 시민사회 운동을 할 때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지만, 정부에서의 본격적인 협업은 노무현 정부 때부터 였는데, 이것이 이후에도 꾸준히 정치적 동지 역할로서 이어진 것이다. 이해찬이 김어준의 파파이스 방송에 나와서 한 말에 의하면 “정치를 안 한다던 문재인을 정치권으로 끌어들인 일등 공신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진행자 김어준으로부터 “나쁜 일을 했군요”란 농담도 덤으로 들었다. 김어준의 파파 이스 135화에서 나온 말이다.

정치권에서 잘 알려진 애연가였다. 원래 과거 민주당계 정당 소속 정치인들이 다른 당 정치인들보다도 유독 담배를 많이 피웠다고 하는데, 이해찬은 그 중에서도 유명한 애연가로서 김한길, 박상천 등과 함께 당 회의실 내에서 담배를 즐겨 피우던 걸로 유명하고, 특히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할 때는 국무회의 후 노무현 대통령과 종종 맞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했다고 한다. 노무현은 당시 주치의로부터 금연 권고를 받은 상태였고, 권양숙 여사의 잔소리 때문에 눈치를 보며 담배를 못 피우고 있었는데, 이해찬이 회의실에 들어오면 그에게 담배 몇 개비를 부탁해 함께 피웠다고 한다. 2012년 민주통합당 대표 시절에는 사무실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흡연 장면이 포착된 여러 사진으로 보아 평소 즐겨 피우던 담배는 에쎄였던 듯.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매생이국이었다.

인민혁명당 사건의 영향을 받아 정권에 의한 사법살인이 자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공식적으로 사형제를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림동에서 1978년부터 ‘광장서적’이라는 서점을 운영한 바 있다. 이 서점은 이해찬이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동생 이해만이 운영하였으며 처음에는 인문사회과학 서점이었으나 이후 고시서적을 주로 취급하게 되었는데 비교적 가격이 비싼 고시서적을 할인 없이 판매해 괜찮은 수익을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유서가 깊고 규모가 큰 서점이어서, 신림동 고시서점 중 목이 좋고 가장 유명했던 ‘상원서적’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의 랜드마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었으나 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되면서 여느 고시서점들과 마찬가지로 몰락하여 2012년 12월 31일 부도를 내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광장서적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북션’ 서점이 들어서 있다.

강성 성향에 직설적인 언어로 인해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정치인이였다. 그렇다 보니 별명도 크게 갈리는데 지지자들 사이의 애칭은 ‘해찬들’, ‘찬들이형’, ‘해찬옹’ 또는 ‘대장부엉이’라 불리며 비토 세력들에게는 ‘해골’, ‘해골바가지’, ‘해골찬’, ‘카서스’, ‘샌즈’, ‘사케찬’, ‘이해골’ 등의 멸칭들로 불린다.

국무총리 시절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발적인 역할 분담으로 행정부 2인자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역대 국무총리 중 김종필과 더불어 실세 총리, 책임 총리의 대명사로 불리게 됐다. 세종특별자치시의 설계 및 추진 또한 이해찬이 총리로 일할 때 이루어졌다.

한때 진보계를 대표했던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당선되었을 때 캡처된 사진처럼 무표정인 모습이 많아서 포커 페이스 이미지로도 유명하다. 깐깐해 보이는 분위기까지 맞물려서 더욱 그럴싸하다.

위 사진은 동료 의원인 문희상과 함께 국회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장면으로, 문희상은 참여정부 시절 초대 대통령비서실장[31]으로 일했던 적이 있었고 이해찬은 앞서 말했듯이 참여정부 시절 법에 보장된 권한을 마음껏 행사했던 ‘책임 국무총리’로 일한 적이 있어서 둘 다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며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유세를 지원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우연히 취임식 날 사진에 표정이 이렇게 찍혀서 마치 반(反)문재인 성향 의원들이 억지로 참석한 모습처럼 보인다는 유머가 존재한다.

민주당 의원들 중 인상파로 분류된다고 하며 이는 문희상과도 비슷하다. 그래도 살집이 좀 있어 웃을 때 밝은 표정이 묻어나는 문희상과는 다르게 까칠함이 많이 나오는 편으로 실제 성격도 어느 정도 대치된다고 한다.

사드 배치 논란에 대해서는 배치 반대 쪽인 걸로 보인다. 연합뉴스 2016

20대 국회의원들 중 유일하게 총리 경력이 있는 의원이었지만 이후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국무총리가 되면서 유일하지 않게 되었다.

201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 시절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보이는 증상을 자주 보이곤 했다. 2017년 김어준의 파파이스와 같은 공개석상에서 나온 모습을 보면 가끔씩 손을 떨거나 말이 끊기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젊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으로, 예전에는 말을 날카롭고 빨리 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던 인물이다. 따라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여러모로 고문 후유증이 생긴 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다. 특히 2018년 7월 20일 민주당 당대표 선거 출마 기자회견에서는 몸을 떨고 코를 훔치는 등 건강에 문제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도 건강이 상당히 악화되어서 3월 27일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엔 이낙연 공동선대위원장에게 선거 관련 업무를 일임하기로 했다. 민주당과 시민당의 공동 출정식 날에는 겨우 퇴원하여 연설을 했는데 연설 내내 입이 떨리는 모습을 보이는가 한편, 2024년 2월 광주광역시를 방문했을 때도 지팡이를 짚으며 걸으면서 연설 내내 말을 다소 더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모친인 박양순 여사는 2017년 10월 30일, 향년 100세에 나이로 사망했다.

2018년 6월 15일, TBS <장윤선의 이슈파이터> 와 한 인터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개혁세력이긴 하지만 진보는 아니다. 중도우파에 가깝다고 평가했으며 한편으로는 더불어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는 정당들은 우리나라의 사회 구조상 깊이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밝혔다.기사

21대 총선이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당시 당 대표 역임했던 이해찬 본인 역시 이전 추미애 대표처럼 당 대표 임기를 정상적으로 모두 마치고 물러날 수 있었다. 재야에서 시작해서 국무총리, 7선 의원까지 할 만큼 다 한 정치 인생이 된 셈.

흔히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라는 별명은 김종필이나 이회창의 일생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되지만 이해찬의 행적 역시 그런 별명이 붙어도 괜찮아 보일 정도로 화려하다. 일단 국회의원 7선에 국무위원으로써는 주요부처인 교육부 장관 및 국무총리 경력이 있고 당직 역시 원내부총무에서 당무기획실장을 거쳐 선거기획단장, 최고위원, 당대표까지 요직 테크트리를 차근차근 다 밟아온 것. 심지어 정무부시장 경력도 있으니 지방행정 경력도 일단 모양새는 갖추고 있다. 다만 두 사람과 차이를 찾아본다면 정치인 이력 이외의 부분에서 법조인 출신으로 판사, 대법관을 거쳐 감사원, 선관위 등 감사/감시기관 경력을 가진 이회창이나 군인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 경력을 가진 김종필에 비해 이해찬의 경우는 순수한 정치인 이외의 공직경력은 사실상 없어 공직 경력이 단조로운 편이다. 그 대신 두 사람에게는 없는 재야 시민사회운동 경력이 있으니 나름의 색깔은 있다 할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본인의 마지막 지역구였던 곳이 세종특별자치시라서 그런지 세종역 설치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후에 이해찬이 물러나고 난 뒤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갑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김종민 의원은 한 발 더 나아가 장군면 하봉리에 직선화 호남고속선을 골자로 한 세종역 설치를 공약하기도 했다.

역대 국무총리들 중에서 정원식, 김부겸과 더불어서 아들이 없는 세 명의 국무총리 중 하나였다. 단, 정원식은 딸만 넷을 두었고, 김부겸은 딸만 셋이고, 이 이해찬은 무남독녀 외동딸만 있다. 아들이고 딸이고 자녀가 아예 없는 한덕수는 논외이다. 이해찬은 지극한 딸바보로 유명하다. 수감 중에도 당시 글을 모르는 아기인 딸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썼고 부인이 임신 중 감옥에 가서 딸이 태어나는 것을 못 보고 있다가 출소한 것을 부인과 딸에게 평생 미안해했다고 한다. 이해찬의 부인이 신문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 남에게 차가워도 부인인 본인에게는 부드럽고 자상한 걸 느끼지만 딸 앞에서는 본인에게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껌뻑 죽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이 같은 모습은 딸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평생 보였다고 한다.

겉늙어보이는 외모와 다소 이른 정계 은퇴로 인해서 팔순 안팎의 상당한 원로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1952년 생으로 2025년 기준으로 불과 73세였다. 생각보다는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던 편이었는데, 대표적으로 전 대통령 문재인과도 겨우 1살 차이였고 전 대통령 윤석열과는 8살 차이, 현 대통령 이재명과 11살 차이, 자신의 후임인 전 당 대표 이낙연과는 동갑내기며, 당내 최고령 의원인 박지원보다는 10살이나 어리고, 김진표보다도 5살 어리고, 같은 원로 정치인으로 여겨지는 김종인보다는 띠동갑 연하로 워낙 노안에 은둔해서 그렇지 실제로는 현역 정치인 나이대이고 고령이라 말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런데 정계 은퇴 이후 급격하게 늙은 보습을 보이며 점점 위태위태한 보습을 보이더니 결국 2026년 1월 항년 73세라는, 죽기에는 많지 않은 나이에 안타깝게 객사로 사망하게 되었다.

사회학 기초 교과서 중 하나인 C. 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공역한 적이 있었다.

사회학자 미셸 푸코의 서적을 자주 읽었다.

현재까지 민주당에서 당대표 임기를 모두 채우고 퇴임한 마지막 당 대표이다. 2012년 민주통합당 시절 대표를 지냈을 당시에는 중도 사퇴하였으나 2018년 더불어민주당에서는 당대표 임기를 모두 마치고 퇴임하였다. 후임인 이낙연 대표는 대선 출마 기한으로 인하여 사퇴하였고 그 다음 대표인 송영길 대표는 20대 대선 패배로 인하여 사퇴하였다. 한편 그 다음 대표인 이재명은 약간 논외인데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함에 따라 불명예 사퇴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입지가 너무 높아져서 연임을 결심함에 따라 전당대회 출마를 위해 사퇴했다. 그리고 그렇게 출마한 전당대회에서는 압승하여 대표 연임에 성공했는데 이번에는 12.3 비상계엄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로 제21대 대통령 선거의 조기 실시가 확정됨에 따라 대선 출마를 위해 또다시 사퇴했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3년 2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서울곰탕집’이라는 이름으로 곰탕집을 차렸으나 세금 때문에 1년도 안 되어 다른 사람에게 팔아치웠다고 한다. 음식점을 차린 이유는 합법적 정치자금 조달. # 곰탕은 이해찬이 직접 끓였다고 하며, 2019년에 델리민주 공식 유튜브에 당시 곰탕 레시피를 공개하기도 했다.

홍준표가 초선 의원 시절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있었는데, 당시 신한국당에는 홍준표, 김문수, 권철현 세 사람이, 새정치국민회의에는 이해찬, 방용석, 한영애 세 사람이 글자 그대로 ‘카운터 파트너’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가 정치를 30여년 하면서 만난 가장 똑똑한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이해찬 총리다. 머리 회전도 빠르고, 수치 계산, 암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증언하면서 그래서 홍준표 본인은 상임위에서 이해찬 의원을 이기려고 밤낮 없이 공부했다고 한다.

선거 이력

지역구 7전 7승이라는 대기록을 가지고 있다. 물론 민주당계 정당 지지율이 높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을에서 5선, 본인이 국무총리 시절 수도 이전을 전면에서 지휘한 곳인 세종에서 2선이라 유리한 점도 있지만, 어려운 선거에서 거물들과의 대결에서도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3대 총선에선 민주정의당의 김종인, 통일민주당의 초거물 김수한 총재를 꺾고 당선되었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충청도 지역 정치권의 초거물 심대평을 상대로 완승을 거뒀으며, 제20대 총선에서는 김종인 비대위원장에게 공천 컷오프를 당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무려 5자 구도를 뚫고 당선되어 이후 복당하기도 했다.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불출마하고 정계 은퇴를 하면서, 선거 전승 기록을 유지하게 되었다. 향후 시흥 을 조정식 의원이 2028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다면 이 기록을 가질수 있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7승 무패를 거두면서도 득표율은 한 번도 50%를 넘긴 적이 없다는 점.

본인의 엄청난 당선 이력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선거 전략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에, ‘선거의 제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심지어 네명의 민주 정부 대통령 탄생에 직간접적으로 모두 관여하여 ‘킹 메이커’라고도 불린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김대중의 핵심 참모로 활동한 끝에 그를 결국 대통령으로 당선시켰고, 제16대 대선 노무현 캠프에서도 선거기획단장으로서 선거를 총지휘하여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으며,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선대위원장을 맡아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고, 이재명의 정치적 멘토로 활동하며 결국 이재명까지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2020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공동상임선대위원장이 되어 역사적인 대승을 두 차례나 이루면서, 별명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 때문인지, “농담삼아서 좀 교만하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왜 선거에서 지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심지어 평생 선거에서 한번도 공직선거법 위반 시비를 받은 적도 없다. 본인도 이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고.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무려 29년간 지역구 선거를 일곱 차례 치르는 동안 단 한 번도 기호 1번을 달고 선거에서 뛴 적이 없다.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호 1번을 달고 치른 총선은 통합민주당의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와 더불어민주당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인데 세 번 모두 선거에 나서지 않았기에 기호 1번을 달지 못했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는 야인 상태에 있었고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선에서 지원하는 당대표와 상임선대위원장으로서 선거를 지휘하는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