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 비교 (미켈란젤로 이후 400년 뒤 버전)
그리스도교 미술에는 ‘피에타’라는 주제가 있다.
라틴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의미인데,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주검을 안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다.
피에타, 피에트로 페루지노 – 아비뇽의 피에타, 앙게랑 카르통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피에타
예술가들이 피에타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경부터였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피에타 하면 이 작품이 떠오를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1498~1799년 중반의 젊은 나이에 만든 피에타를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성모님을 실제 비례보다 훨씬 크게 조작해서 예수님의 주검을 안은 모습이 어색하지 않도록 처리했다.
그리고 30대 아들을 둔 어머니였음에도 성모님의 얼굴을 젊게 표현한 건 세속의 추잡한 때가 티끌만큼도 묻지 않은 동정녀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수태고지(예수님의 탄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고받음) 때 ‘ ‘Fiat Voluntas Tua’(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며 순명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마주한 성모님은 아들의 시신을 무릎 위에 눕혀 안고 하늘을 향해 왼쪽 손바닥을 펴서 살짝 들어올려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면 순명하겠다’는 것을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묘사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정면에서는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지만 천장(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즉 하느님의 관점에서 예수님이 보이게 만들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성모님이 주인공인 작품인가?”라는 질문에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은 인간의 관점에서 만든 작품이 아니오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이 피에타는 이후 다른 예술가들이 피에타를 주제로 다룰 때 그림으로든 조각으로든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72년 한 정신병자에 의해 성모님의 코와 왼팔이 박살나기도 했다.
400년 후 새로운 피에타
미켈란젤로가 저 피에타를 만들고 400년이 지난 1930년대 독일에서 새로운 피에타가 탄생한다.
독일 프롤레타리아 회화의 선구자 케테 콜비츠가 1937~1938년 70대의 나이에 만든 피에타.
원제는 죽은 아들과 어머니(Mutteer mit totem Sohn)’이다.
노동자, 농민, 빈민 등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대상으로 삼았던 케테 콜비츠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아들 페터가 참전했다가 전사한 후 반전주의와 평화주의를 주제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대비된다.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는 젊은 동정녀가 아니라 세월의 풍상을 그대로 겪은 나이 든 모습이다.
잔뜩 웅크린 아들의 시신을 품에 꼭 끌어안은 어머니는 슬픈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그대로 드러낸다.
어머니의 왼손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달리 하늘을 향하지 않고 죽은 아들의 오른손을 살포시 잡고 있다.
패기 넘치는 20대 젊은 천재가 만든 피에타가 아니라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70대 어머니가 만든 피에타.
1993년 독일 통일 후 독일 정부는 전쟁 피해자를 추모하는 기념관인 노이헤 바헤(Neue Wache)를 다시 개관하면서 게테 콜비치의 피에타를 확대 복제해 전시한다.
노이헤 바헤 천장에 뚫린 둥근 천장을 통해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이 그대로 조각에 떨어지며 관람객은 이를 통해 자식을 잃은 슬픔에 잠긴 어머니를,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닌 세상 어디에나 있는 미약한 인간인 어머니를, 전쟁이 앗아간 운명 앞에서 달리 어찌할 바가 없어 그저 자식의 시신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를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