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신 프로필 (싱어송라이터)
월간 윤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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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신 X
개요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
생애
1969년 10월 15일 경상남도 진해시(現 창원시 진해구)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 잠깐 살다가 5살 무렵 서울 광진구로 상경, 그 뒤 대원 외국어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터보라는 이름의 스쿨밴드를 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국어국문학과 88학번으로 입학 후 ‘소리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라는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다.
본래 음악을 좋아하여 노래나 작곡을 취미로 하긴 했지만 사실 진짜 꿈이 가수, 작곡가는 아니어서 진지하게 노력했던 건 아닌데 우연히 교내 가요제에 참가했다가 수상 후 운이 좋아서 데뷔한 케이스라고 한다. 만약 자신이 신학과에 합격했다면 목사가 되고, 가수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음악 스타일에도 찬송가의 영향이 크다고도 하는데, 어릴 적부터 기독교 음악을 많이 접한 탓이라고 한다. 미래캠퍼스 홍보비디오에도 나왔고, 과거 라디오에서도 ‘미래캠퍼스에 다닐 때 크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다’는 등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이따금씩 했다.
연세대 미래캠퍼스 가요제에서 금상으로 입상한 이후, 과 동기로부터 정석원을 소개받았다. 정석원은 친구의 아파트에서 윤종신의 노래를 듣고 015B의 객원보컬로 픽업했다. 이 때 장호일이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비주얼. 그래도 보컬이 밴드의 얼굴인데… 가창력만으로 승부한 데뷔였던 셈이다. 그런데 윤종신이 특유의 친화력으로 정석원의 마음을 얻었고, 둘이 급격히 친해지면서 장호일로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90년 7월 15일, 015B의 데뷔 앨범이 발매되면서 윤종신도 가수로서 데뷔하였다. 같은 해에 데뷔한 신승훈(11월 1일), 윤상(11월 30일)보다도 날짜가 빨랐다. 종종 “나 노태우 대통령 때 데뷔했어! 심지어 걸프전보다도 전이야!”라는 드립을 친다. 이후 5집을 제외하고 015B 6집까지 계속 객원보컬로 참여하였다.
이듬해 1991년 솔로 1집을 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너의 결혼식, 오래전 그날, 환생 등 독자적으로 적잖은 히트를 기록했다. 정규 4집부터는 작사, 작곡뿐만 아니라 프로듀싱도 겸하였고, 5집부터는 작품주의 싱어송라이터로 완연히 거듭났다. 객원보컬로 시작하여 프로 작곡가, 작사가로 인정받은 것은 대한민국 음악 역사상 윤종신이 유일하다. 커리어적으로 발라드계에서 입지전적인 케이스다.
1998년 제대 이후 IMF와 음반시장의 침체로 7, 8집이 망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부터 영화와 예능에 손을 뻗치기 시작하였다. 2000년대 초, 여러 편의 영화 OST를 프로듀싱하며 카메오로 출연, 이후 2004년 논스톱 등에 출연하며 연기자로서도 활동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 시기에도 (2001년) 9집 타이틀 팥빙수라는 불멸의 여름 시즌송이 히트하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는 라디오 스타, 패밀리가 떴다, 나는 가수다 등 굴지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예능 늦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실 윤종신은 90년대부터 라디오 DJ로 활약하며 입담과 예능감을 뽐내 왔기에 예능인으로서의 활약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2008년, 정규 11집 <동네 한 바퀴>를 발매하였지만 철저히 외면당했다.
2006년, 9세 연하의 前 테니스 선수인 전미라와 결혼했다. 힐을 안 신어도 전미라가 더 크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이름은 윤라익(아들), 윤라임(딸), 윤라오(딸). 전미라의 이름 끝 글자를 돌림자로 썼다고 한다. 막내딸은 전미라를 거의 빼다 박은 수준으로 닮았다.
2010년대, 윤종신은 발군의 시간관리능력을 보여주며 음악가, 예능인, 연예기획자의 세 직업 분야에서 두루 성과를 냈다.
첫째, 윤종신의 음악 커리어는 2010년대에 이르러 그 꽃을 피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 5월, 매달 1곡 이상을 발매하는 음악적 실험인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월간 윤종신은 본능적으로, 막걸리나, 오르막길, 탈진 등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며 음악가로서 윤종신을 널리 알렸다. 특히 2017년 6월 발매한 싱글곡 좋니가 대히트하며 데뷔 27년만에 지상파 1위를 하는 쾌거도 이루었다. 2000년대에 비해 창법도 훨씬 안정적으로 변했다. 2020년 현재 무려 20집 가수이다.
둘째, 예능인으로서 윤종신은 라디오 스타의 장수에 힘입어 지상파, 종편뿐만 아니라 케이블에서도 메인 MC로 종횡무진 활약했다. 2000년대 중반의 깐족 이미지를 탈피하고 진중하고 매끄러운 진행 능력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윤종신은 2010년 자신이 속했던 1인기획사 신스타운을 확장하여 미스틱89라는 기획사를 세워 자신의 옛 동료인 조정치, 김연우, 하림 등은 물론 투개월, 박재정, 박지윤, 퓨어킴 등 특색 있는 뮤지션들을 모아 앨범을 프로듀싱했다. 이후 미스틱89는 김영철, 아나운서 박지윤 등의 방송인도 매니징함은 물론 가족액터스와 인수합병하며 명실상부한 종합 연예기획사로 거듭났고, 회사명도 미스틱엔터테인먼트로 바뀌었다. 결국 무려 SM의 자회사로 인수되었고, 사명도 미스틱스토리로 바뀌었다. 인수 이후 윤종신은 회사 경영에서는 물러났으나, 대표 프로듀서 직을 맡으며 소속사의 음악활동에 대해서는 전권을 가지고 활동했다.
2019년 6월 4일 방송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차츰 여러 방송에서 하차했다. 2019년 10월 해외로 출국하였으며, 11월부터 ‘이방인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2021년 3월까지 해외에서 휴식하면서 월간 윤종신 등 다양한 콘텐츠 제작에만 매진할 예정이다.
2020년부로 데뷔 만 30년을 맞았다. 그러나 코로나 여파와 ‘이방인 프로젝트’로 인해 기념활동 가능성은 미지수다. 놀면 뭐하니?를 통해 결국 귀국했음이 확인되었다. 본래는 정말로 이방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해외에서 지내려고 했지만, 코로나 사태와 모친의 위독으로 인해 그 프로젝트를 연기하고서 귀국했다.
음악가 윤종신
윤종신은 015B의 객원보컬에서 시작한 뒤에 작곡, 작사, 프로듀싱 능력을 갖추었다.
2013년 음악취향Y라는 웹진에서 발라드 베스트 100곡을 뽑았는데 총 7곡에 참여하여 이문세, 유재하, 이승환, 신승훈, 김동률, 김형석 등 내로라하는 80~90년대 뮤지션을 능가하여 최다 노미네이트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여러 분야에서 각각 골고루 차트에 올린 것도 주시해볼 만하다.
보컬(015B 객원보컬): 텅 빈 거리에서 (2위), 우리 이렇게 스쳐보내면 (64위)
자작곡: 너에게 간다 (24위), 처음 만날 때처럼 (65위)
작곡/작사: 거리에서(성시경) (15위), 넌 감동이었어(성시경) (91위)
작사: 이별택시(김연우) (96위)
보컬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유행하는 창법은 풍부한 성량과 감정을 담아내는 호소력 있는 보컬인데, 윤종신의 목소리는 그와 정반대로 깔끔한 발음과 발성이 특징이다. 그래서 담백하면서도 절절하게 감정이 묻어나는 편이다. 가사 전달력은 국내 최고다.
이는 윤종신의 가사와 맞물려 더 큰 감정 동요를 일으킨다. 이별하고 미쳐 죽을 것 같은데 그걸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백하게 부르니 앞에서는 담담하게 얘기해도 속은 썩어들어가는 이별한 남자의 정서를 극대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너의 결혼식’에서 절규하듯 부르던 시절의 보컬 스타일과 비교하면 감정을 조금 누르고 절제시킴으로써 더 애절하게 만드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모든 노래를 담담하게만 부르는 것은 아니다. 윤종신이 지르는 노래들은 대개 히트하는 경향이 있다. 가깝게는 ‘좋니’부터, ‘너의 결혼식’, ‘부디’, ‘몬스터’, ‘오르막길’, ‘1월부터 6월까지’ 등.
국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발음을 굉장히 중요시 여긴다. 한국어에 서툴렀던 박정현의 1집 프로듀서가 윤종신이었는데, 그때 박정현의 한국어 발음이 많이 나아져서 지금도 감사하다고 한다. 성시경, 유희열, 정준일 등의 동료 가수나 라디오 스타 MC들이 윤종신의 또박또박한 발음을 자주 디스했다. 2014년 4월 9일자 라디오 스타에서 정준일이 말한 “종신이형 창법은 중국 노래 같다.”라는 내용을 보면 된다. ‘머’나~ ‘머’언~ ‘길’~ ‘떠’나는~
모 예능에 의하면 라틴 계열 발성에 잘 어울린다고. 하여간 여러모로 특이한 보컬. 뽕끼도 있어서 트로트도 잘 한다. ‘사랑의 뒷북’이라는 트로트 싱글을 낸 적이 있다.
데뷔 당시 윤종신은 옥구슬같은 미성을 자랑했다. 그러나 솔로 1집(1991년)~2집(1992년) 사이에 맑은 음색이 사라지고 목소리가 굵어졌다. 3집에서는 명확히 달라진 게 느껴진다. 그러다 4집(1995년) 전후로 목소리가 급격히 탁해지더니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 목소리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당장 1999년에 나온 <후반> 때 목소리와 2001년 9집 <그늘>을 연달아 들어보면, 그 2년 사이에도 많이 달라져 있다.
당시 같이 미성으로 이름을 날렸던 신승훈도 그의 목소리가 너무 변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또다른 미성의 대명사인 이승환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아는 가수 중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이 목소리가 변한 가수라고 한다. 이 목소리 변화는 위에서도 말했듯, 어느 날 갑자기 확 바뀌지 않았고, 몇 년에 걸쳐 미성이 사라지고 탁성이 나타나는 등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2001년 9집 <그늘> 이후에는 잦은 흡연 + 음주의 영향으로 발성이 더욱 나빠졌고, 2002년~2003년 사이에는 조금만 음을 올려도 목소리가 갈라지고 가래가 낄 정도로 목소리가 나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2001년과 2005년 사이에는 정규앨범은 내지 않고 OST 제작, 타 가수 음반 제작에만 참여하였다. OST 중에도 윤종신이 부른 <밤차>나 <어느 예비군의 편지>를 들어보면 탁하디 탁한 윤종신의 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2005년 10집~2008년 11집 당시에는 성대가 온전히 닫히지 않고 바람이 많이 들어가는 소리를 낸다. 11집 발매 직후 출연한 수요일 밤 MBC의 음악프로 음악여행 라라라에서 본인의 옛 노래들을 매우 힘들게 부르더니, SBS의 음악프로그램인 김정은의 초콜릿에서는 7집 타이틀곡 ‘배웅’을 부르다가 가래가 낀 듯한 목소리를 잠시 냈다. 그래도 3옥타브 도까지는 올렸다.
윤종신 본인에 따르면 잦은 음주와 흡연으로 인해 목소리가 변했다고 한다. 가수들 사이에서 말술로 유명하다. 라디오 DJ로 활동하던 시절 밤 늦게 술 마신 얘기를 자주 했다. 헤비 스모커로도 유명했다. 그러다 한 번 쓰러지고 크론병을 앓은 이후로는 술과 담배를 많이 줄였고, 담배는 거의 끊었다. 테니스를 통해서 몸은 오히려 좋아졌다고 하며 금연쏭이라는 제목의 싱글도 냈었다.
그 결과 2010년대 들어 윤종신은 보란듯이 성대를 갈아끼우는데… 2010년 이후 절주, 금연하면서 가창력이 확연히 좋아졌다. 2009년~2010년 한 해만에 가창력이 확연히 달라졌다.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고음역대의 발성이 엄청 단단해졌다. 나이가 무색하게 짱짱한 고음을 뽑아내는 중. 2016년 6월 월간 윤종신 의미 없다에서의 최고음은 3옥타브 레. 물론 반가성 느낌의 샤우팅 발성이고, 저 노래를 라이브 무대에서 부를 가능성은 낮지만 이걸로 리즈 갱신은 확정. <좋니>로 활동하면서도 한 번도 무대 실수 없이 2옥타브 시를 어렵지 않게 냈다.
2010년대의 라이브가 2000년대보다 훨씬 듣기 좋다. 예를 들어, 2002년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키를 낮추고도 겨우겨우 불렀던 담배 한 모금을 2015년 작사가 콘서트에서는 원키로 가뿐히 부른다. 다만 깨끗하고 얇은 가성은 이제 더이상 나지 않는 듯. 데뷔 초에는 무려 3옥타브 라까지 올라가던 청명한 가성을 더는 들을 수 없다. 좋니 라이브영상들에서 3옥타브 레♯(D♯5) 가성을 거칠게 낸다. 원래 가성이란 게 성대에 상처가 많이 나 있을수록 바람 빠진 소리가 나기 때문에 가성을 내면 소리가 상당히 거칠다. 그 대신 그때보다는 중저음이 훨씬 탄탄해졌다.
미성이었던 흔적이 있다 보니 윤종신의 음역은 절대 낮지 않다. 2017년 히트한 “좋니”만 해도 진성으로 최고음이 2옥타브 라♯(A♯4)이다.
판타스틱 듀오에서의 ‘지친 하루’ 라이브 영상. 5분 5초에 벨팅에 가까운 진성으로 3옥 레♯을 낸다.
미성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스페이스 공감에서 라이브로 부른 2017 월간 윤종신 6월호 <끝 무렵>을 들어보면 정확히 알 수 있는데 진성을 내다가 가성으로 넘어가는 곳에서 꽤 맑은 음색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라이브 보러가기. 음색 변화의 원인엔 음주, 흡연같은 관리 문제와 노화도 있겠지만 본인이 의도한 것도 있는 듯하다. 2013 월간 윤종신 Repair 프로젝트 9월호에서 부른 굿바이[37]에서 부드러운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음 부분에서 특히 몸을 구부리며 반동을 이용하는 모습이 보인다. 실제로 반동이 있으면 고음을 낼 때 훨씬 더 강력하게 낼 수 있지만 실용음악적으로 권장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탄탄한 발성보다 예전의 불안하지만 애절한 목소리가 더 감정적으로 듣기 좋다는 의견도 있다. 좋니가 히트하여 무대영상이 많이 돌고 있는 데 하나같이 몸을 움츠리고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작사
작곡에서 윤종신을 그저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작사만큼은 이견없이 그 수준을 인정하는 편. 역시 국문과 전공자답다. 윤종신의 작사에서는 인간 본성의 여러 모습을 대하는 그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는 평. 대중음악에서 작사가로서는 항상 손에 꼽히며 많은 가수들이 윤종신을 작사가로서 본받는다고 한다. 젊은 싱어송라이터들의 독창적이고 세련된 감각과는 달리 연륜과 문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스러운 구성과 흐름을 담아내는 능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노래가사로 본다고 해도 마치 사실적인 감정을 적어낸 수필같은 느낌이다.
디렉터스 컷에서 작사에 대해 윤종신 본인이 직접 얘기한 바로는 자기는 작사에는 잘하고 못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물론 겸손의 의미로 한 말이며, 옆에서 하림이 ‘근데 형은 잘하잖아요’라고 바로 되받아쳤다. 가사도 굉장히 금방 쓴다고 하며, 믿거나 말거나지만 거리에서도 2절 가사가 없었는데 즉석에서 만들어줬다고 한다.
발라드 가사에 잘 등장하지 않는 의외의 상황이나 주제를 묘사하는 생활밀착형 가사를 자주 쓴다. 노래의 화자는 대개 찌질하고 볼품없는 남자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랑이나 이별을 주제로 한 작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윤종신 특유의 ‘한끗’이 있는 표현, 혹은 하이퍼리얼리즘적 표현으로 가슴을 절절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 편. 가사를 다 쓰고 나면 가수들에게 가사를 보여주며 ‘여기 이 표현은 앨범 몇 장짜리, 이 표현은 몇 장짜리’ 하는 식으로 포인트를 짚어준다고 한다.
EBS 공감에서 김연우는 이별택시를 소개하면서 발라드에 감히 넣을 수 없는 ‘아저씨’ 라는 단어를 넣어서 녹음실에서 유희열과 함께 미쳤냐고 했다는 에피소드를 언급했다. ‘~기에’라는 표현을 작사에 자주 이용하는 듯. ‘-ㄴ다’를 가사에 쓰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고 성시경이 언급한 적이 있다.
박정현은 한국에 와서 윤종신이 작사한 ‘오랜만에’를 사전을 찾아가며 의미를 해석했고, 의미를 알게 된 후엔 가사가 너무 좋아서 ‘한국에도 작사를 시의 수준으로 해내는 사람이 있구나’하고 감탄했다고. 심지어 신사동호랭이같은 댄스 작곡가들에게도 작사가로는 존경받고 있는 롤 모델이라고 한다. 윤종신 작사, 이규호 작곡의 ‘팥빙수’는 가요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요리 레시피를 가사로 쓴 것이라 개그소재 등으로 자주 애용된다. 어느 방송에서 가사를 어떻게 썼느냐는 질문에 “인터넷에서 팥빙수 레시피를 검색했다”고 밝혔다. 본인 스스로 ‘대한민국 푸드송의 원조’ 라고 주장했으나 별 근거는 없다. 요즘은 예능용으로 자주 써먹는다. 박명수의 “바다의 왕자”, 쿨의 “해변의 여인” 등과 함께 오래도록 깨지지 않을 여름의 레전드 곡이다.
2009년 무한도전의 ‘강변대로 듀엣 가요제’에 ‘영계백숙’을 작사/작곡하기 했다. 그 기세로 또 하나의 푸드송 “막걸리나”를 내놓았다(국순당이 부탁해서 만든 막걸리 로고송) 2013년에는 망고 쉐이크라는 노래도 냈다. 2014년에는 ‘눈송이 빙수’, 2015년에는 ‘쿠바 샌드위치’로 영계백숙에 이은 두번째 핫 푸드 송도 냈다. 그리고 아무도 기억을 못하지만, 박경림이 전대미문의 히트를 쳤던 곡 ‘착각의 늪’이 수록된 앨범 ‘박고테 프로젝트’에 ‘안녕 핫바’라는 푸드송을 수록하기도 했다. 당시엔 본격적인 예능인이 되기 전 시절이라 방송에서도 진지하게 작사작곡을 하는 모습만 비춰졌다.
2016년 이후에는 월간 윤종신 수록곡들을 통해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을 제외한 다른 주제들도 자주 노래하는 편이다. 2017년 1월호 ‘세로’에서는 차트 줄세우기 위주의 음반계를, 2016년 12월호에서는 촛불정국을 노래했다. 중장년층, 혹은 나이든 뮤지션으로서의 심경도 자주 노래하는 것 같다.
참고로, 윤종신의 디스코그라피에는 약 10년 주기로 본인의 나이를 노래한 곡이 몇 곡 있다.
28살 : 나의 이십대 (6집, 1996년)
37살 : 서른 너머… 집으로 가는 길 (10집, 2005년)
43살 : 나이 (13집, 2011년)
48살 : Old School (2016년)
윤종신이 작사에 자주 이용하는 소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벽지무늬/천장: 아이유 – 벽지무늬 / 박재정 – 시력 / 신치림 – 굿나잇
동네 및 거리: 윤종신 – 돌아오던 날, 동네 한 바퀴, 모처럼, 야경 / 성시경 – 거리에서 / 박정현 – 미아
우연한 조우: 나윤권 – 미행, 뒷모습 / 이수영 – 스치듯 안녕
요리 및 음식: 윤종신 – 팥빙수, 영계백숙, 쿠바 샌드위치, 막걸리나, Home Made, 눈송이 빙수, 망고쉐이크… / 박고테 – 안녕 핫바
여행, 입/출국: 박재정 – 여권 / 하림 – 출국 / 윤종신 – 도착 (Vocal 박정현)
독특한 장소 및 물건: 윤종신 – 수목원에서, 일년, 치과에서, 자유로 Sunset / 성시경 – 굿모닝
계절: 윤종신 – 이별의 온도, 가을옷, 늦가을 (Vocal 규현), 12월, 바캉스 매니아, 결국 봄, Welcome summer, 나른한 이별 (Vocal 조원선)
헤어진 전날/당일/다음날: 윤종신 – 이별을 앞두고, 내일 할 일, 아침, 고요 / 김연우 – 이별택시 / 박정현 – 전야제 / 아이유 – 첫 이별 그날 밤
치명적인 것 (독, 병 등): 김연우 – 해독제 / 윤종신 – 몬스터 / 하림 – 난치병 / 박정현 – 몽중인
작곡
윤종신은 015B 객원 보컬 출신으로 솔로앨범을 낼 때 작사/작곡까지 참여하면서 스스로의 노래를 만드는 싱어송라이터로 발전했다. 유영석은 싱어송라이터를 두 부류로 분류하는데 보컬에서 작편곡을 시작하면서 싱어송라이터가 되는 부류, 전문 작곡가가 보컬에 참여하면서 싱어송라이터가 되는 부류이다. 윤종신은 바로 전자에 해당된다.
그런데 윤종신이 작사/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전문적으로 편곡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곡이 전문 작곡가와의 공동 작곡이고 편곡을 맡긴 경우가 많다. 디렉터스컷 방송을 보면 음표도 잘 못 그린다. 이 때문에 편곡 및 채보를 위한 서포터가 필요한데, 이들이 윤종신의 음악노예들이다.
윤종신은 015B 시절 정석원을 만나면서 작사 작곡에 눈이 떴다고 술회했다. 화성학을 배운 적이 없다 보니 최초로 스스로 작사/작곡/프로듀싱한 4집 타이틀곡 ‘부디’를 처음 들은 정원영 밴드의 정원영이 “윤종신 이 자식 뭐하는 놈이지”라고 농담으로 디스하기도 했다고 한다. 출처 더불어 화성학을 공부하지 않은 덕분에 작곡을 할 때 틀에 박힌 코드에 얽매이지 않아 독특한 곡들을 많이 뽑을 수 있다며 이야기하기도한다.
한 엠팍커가 2011년에 분석한 윤종신의 작곡법 최근 방송에 노출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곡을 쌓아 놓고, 집에 ‘고객상담용 모니터’가 있으며 폴더별로 나뉘어서 들려줄 정도로 공장장. 거기다 상당히 쿨한 성격이라 곡이 까여도 ‘마음에 안 드니? 그럼 이건?’라는 식이다. 메일 등을 이용해서도 노래를 무진장 가수들에게 뿌린다고 하는데, 성시경에게는 한 번에 9곡이 온적도 있다고 한다.
대개 편곡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 때문에 작곡 당시에는 본인이 직접 친 통기타 반주에 본인 목소리로 가이드를 넣는 것 같다. 다분히 옛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즘은 가이드 곡이라도 편곡이 상당부분 완성된 상태로 나가고, 가이드도 실력파 보컬들이 맡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팝송으로 들릴 정도로 세련되게 다듬어진 상태로 가수들에게 전달된다. 디렉터스컷에서 전한 일화에 따르면, 한번은 윤종신이 이효리에게 곡을 주려고 기타로 반주를 치고 멜로디를 흥얼거려서 녹음한 뒤 메일로 보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헌데 나중에 이효리가 자기한테 굉장히 세련된 팝송을 들려주길래 “야 이거 좋다. 누구 노래야?” 라고 물어봤더니 이효리에게 온 가이드 곡이었다고 한다. 자기는 통기타를 쳐서 흥얼흥얼 녹음한 뒤 “나중에 편곡이 되면 여기에 이런 비트가 들어갈거야, 상상되니?” 하는 식인데 이효리가 받는 가이드 곡들은 이미 완성품 수준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감성적인 멜로디와 감정을 억누르다 후반부의 폭발하는 전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대표적인 곡이 “너에게 간다”. 이런 노래들을 ‘매달’ 국수 뽑듯 뽑아내고 있는 괴물이다. 최근 윤종신의 탈곡기에서 자신의 작사/작곡법을 공개하고 있다.
프로듀싱
윤종신의 프로듀싱 능력은 015B 시절 음악적 스승이었던, 그리고 솔로 1~3집을 프로듀싱해 준 정석원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스스로 프로듀싱한 것은 4집 ‘공존’부터다.
유희열에 따르면 윤종신은 ‘뮤지션들이 휴지기를 가져야 음악이 나온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즉, “녹음실 갈 때나 집 갈 때 생각나면 쓸 수도 있는 것. 그건 급하지 않아서 그렇다”라고 했다. 유희열은 “만년 대리”같다고 평했고, 성시경은 요즘 임원이 되어서 음악 노예들을 부려먹는다고 디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희열은 윤종신의 음악노예 1호 수준이었다. 윤종신 특유의 부지런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
“이별여행”으로 유명한 가수 원미연의 말에 따르면, 의외로 윤종신이 깐깐하다고 한다. 2000년대,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윤종신 혼자 프로듀싱한 적도 많지만, 2010년대 이후에는 윤종신이 혼자 작사, 작곡, 편곡을 한 노래는 그리 많지 않다. 스스로도 자신이 화성학 지식이 있는 전문적인 작/편곡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이디어나 멜로디는 자신이 만들고 그것을 곡으로 만드는 것은 조정치, 정지찬, 유희열, 정석원 등 전문가와 공동작업을 해 왔다.
이들 중에 유명한 사람들이 소위 윤종신의 ‘음악노예’들인 유희열, 하림, 조정치. 셋 다 전문적으로 음악을 공부한 정통파들로 전부 윤종신이 발굴하다시피한 인물들이다. 윤종신이 방송에서 대놓고 “신치림은 진짜 천재다.”라는 말을 했었다. 윤종신 본인도 방송에서 자기 자신은 천재가 아니지만 천재를 보는 안목은 있다고 자부했듯이 셋 모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음악인들이다. 유희열은 군에서 제대한 후 정신을 못 차릴 때 낚아챘다고 하며 조정치는 세션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김C를 통해 세션 기타로 추천받았다가 재능을 알아보고 데려왔으며 심지어 하림의 경우 해당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윤종신이 군 복무 시절에 알아보고 계약서를 쓰게 했다고 한다. 윤종신 본인은 이를 예능 소재로 써먹고는 있지만 본인의 한계점을 명확하게 인식한 뒤에 그 점을 보완하려고 재능 넘치는 원석들을 계속 발굴해서 성장시키며 가까이 두고, 서로 윈윈하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그들 모두 윤종신을 무시하기는 커녕 아직도 윤종신 앞에서는 꼼짝못한다는 것을 주목할만하다. ‘나는 천재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한 윤종신의 말은 사실인 것이다. 특히 유희열은 이미지와 달리 의외로 청소년기에 폭력 사고도 쳐본 불량청소년 출신이었고 독립 후에 젊은 나이에도 윤종신을 압도하는 대중음악적 성과를 거둔 대작곡가임에도, 아직도 윤종신 앞에서는 약간 농담을 하는 게 전부일뿐 장난으로조차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형님이라는 말도 (윤종신 앞에서) 한 적이 있다. 윤종신의 말로는 20년전에 세뇌된게 남아서라고 하나, 실제로는 그들도 자신의 리즈시절조차 윤종신의 프로듀싱 능력이 뛰어났다는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프로듀서가 아니라는 비판도 받았다. 윤종신 본인은 이 기사를 자신의 트위터에 리트윗 시켜놓았다.
2000년대 초반 이후로는 군대에서 알게 된 작/편곡가 이근호와 매우 자주 함께 작업한다. 인터뷰 참조. 거리에서, 넌 감동이었어, 시간, 지친 하루, 오르막길 등 2000년대와 2010년대를 걸쳐 이근호의 손을 거친 명곡이 상당히 많다. 알고보면 하림, 조정치 등에 버금가는 전속 어시스턴트. 이근호는 클래식 작곡에 능하여, 윤종신이 흥얼거리는 멜로디에 코드와 반주를 입히고 편곡을 하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근호씨는 2014년 창작동요대회 대상을 수상하였다. 동요뿐만 아니라 성가 등도 작곡한다.
그 외에도 임재범의 ‘통증’, 배우 서현진이 활동했던 걸그룹인 밀크의 ‘Come To Me’ & ‘Wish’를 작/편곡하고, 나얼의 ‘같은 시간 속의 너’ 및 ‘기억의 빈자리’를 편곡하였으며 조규만 & 조규찬 형제와도 작업한 바 있는 작곡가 강화성, 싱어송라이터 정지찬과도 자주 작업한다. 아가씨 OST인 ‘임이 오는 소리’ 프로듀서를 맡았다. 편곡은 조정치. 2018년 들어서는 키보디스트 및 작곡가 송성경(미쓰송)과 함께하는 작업이 잦아졌다.
방송 활동
깐족 컨셉으로 장수하는 예능인으로, 오히려 2010년대 이후에는 예능인으로 더 친숙한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이전에도 예능에 가끔 나왔지만 2007년부터 라디오스타, 패밀리가 떴다등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예능인의 입지를 다졌다.
90년대에 가수로 활발히 활동할 때도 윤종신은 이미 그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깐족의 대명사로 불렸다. 당시 윤종신의 그 간드러지는 평소 목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이 놀랐다고 할 정도였다. 본인도 “라디오 들어본 사람들은 자기가 원래 이런 이미지라는 것을 알 것.”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본업이 가수였기 때문에 예능에 나올 이유가 없긴 했다.
29살에 늦게 군대에 들어간 윤종신은 30이 넘어 제대를 했는데, 자기 생각에 30살이 너무 많은것 같아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무리를 하기 시작한다. 직접 제작에도 참여하면서 그동안 번돈을 모두 날려먹고 2004년엔 집도 없어지고 빚만 6억이 남았다. 본인왈 1999년부터 2005년 까지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얘기했었다. 그래서 자구책 느낌으로 예능, 드라마에 나오기 시작하게 된다.
애초에 윤종신의 캐릭터는 촐싹맞고 얄밉게 깐족대기. 아무래도 나이도 나이고 몸도 몸이니만큼, 몸을 쓰는 일(몸개그를 포함하여)은 어려웠던 듯하다. 대신 쉴 새 없이 말로 태클을 걸거나, 특히 다른 사람이 던진 말장난을 한번 더 받아치는 ‘주워먹기’ 개그에 뛰어나다. 그래서 기프갤에서 얻은 별명이 윤자기. 본인도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2010년 공감토크쇼 놀러와 283회에서 갑자기 윤자기 드립을 쳤다. 그 날 윤종신의 활약으로 놀러와는 음악성과 웃음을 함께 거머쥐며 흥했다. 윤종신은 자기가 나오는 프로그램에서는 거의 모든 드립을 주워먹는다. 특히 독한 것은 그 깐족대는 캐릭터와 겹쳐서 독한 드립은 더 독하게 치는 바람에 말리는 시누이 포지션으로 정착한 것. 김구라조차도 명랑 히어로에서 난 최소한 앞에서 때리지 저 형은 뒤에서 친다고라면서 질색했다.
그래서 방통위에서도 대상으로 찍힌 적 있다고 라디오스타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은 예능인 윤종신과 음악인 윤종신의 괴리감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스스로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와 개그맨 비트 다케시와 같이 생각하면서 예능인과 음악인으로서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다고 얘기하고 다닌다고 한다.
실제로 김구라도 괴리감이나 이미지에 대해서 언급할때 옆에서 “말하는 재능도 있는데 굳이 그걸 감춰야하나??”라고 묻기도했고, 박완규가 라디오스타에 나왔을때도 본인은 예능이 좋아서 하는거라고 얘기했다.
2019년 6월 4일 방송 활동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10월 해외로 출국해 2020년을 해외에서 음악 등 다양한 콘텐츠 제작에만 매진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라디오스타, 방구석1열 등 출연 방송에서 모두 하차한다.
이미 모든 프로그램은 녹화를 마쳤고 12년 동안 MC를 했던 라디오 스타에서는 2019년 9월 4일 마지막 녹화를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녹화후에 “12년간 나의 수요일 일터…그리고 함께 한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라고 감회를 남겼다. 이로써 이제 대단원의 방송을 마무리 짓는다. 인스타그램 녹화후 소감 방송은 2019년 9월 11일로 결정되었다.
유튜버 활동
월간 윤종신 채널이 현재 23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 중이다.
2018년 11월 23일 오후 9시, <윤종신의 탈곡(曲)기>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으로 유튜브 1인방송에 데뷔한다.
2021년에 옛 라디오스타 동료 신정환과 테니스 채널인 前라스를 개설했다. 그리고 토크쇼 前라스 그러지마오를 분리 개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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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사(크론병 투병으로 우루사 복용시 심각한 부작용이 있음에도 모델로 기용되었다)
키자니아(아들 윤라익도 출연)
뮤직카우
수상 경력
1995년
SBS 스타상 라디오 MC상
2005년
MBC 연기대상 라디오부문 우수상
2008년
MBC 방송연예대상 쇼 버라이어티부문 인기상
2009년
MBC 방송연예대상 코미디,시트콤부문 남자 우수상
2010년
MBC 방송연예대상 MC부문 인기상
2011년
MBC 방송연예대상 특별상
MBC 방송연예대상 PD상
2012년
MBC 방송연예대상 남자 최우수상
MBC 방송연예대상 우정상
2014년
MBC 방송연예대상 뮤직토크쇼부문 남자 최우수상
2015년
MBC 방송연예대상 PD상
2016년
MBC 방송연예대상 뮤직토크쇼부문 특별상
2017년
제25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K-POP 가수상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즈 베스트 보컬 퍼포먼스 남자 솔로부문
제9회 멜론 뮤직 어워드 뮤직스타일상 발라드 부문
MBC 방송연예대상 공로상
2017 한국 갤럽 올해의 가요 1위 “좋니”
2018년
제 32회 <골든디스크> 디지털 음원부문 “좋니” 본상
제27회 하이원 서울가요대상 최고 음원상 ‘좋니’
제7회 가온차트 뮤직 어워즈 올해의 파퓰러 싱어상
제7회 가온차트 뮤직 어워즈 K-POP 공헌상
MBC 방송연예대상 뮤직토크쇼부문 남자 최우수상
저서
계절은 너에게 배웠어 (2018.08.23) : 자신이 작사한 가사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실은 수필집. 다만 내용 자체는 본인곡 뮤직비디오에 실려있던 걸 모아놓은 것임으로 새로운 내용을 기대한다면 주의.
여담
윤종신을 잘 모르는 요즘 사람들은 주로 예능에 나오는 연예인, 특히 개그맨인 줄 알지만 데뷔했을 때나 지금이나 본업은 가수. 사실 예전에는 거의 가수 활동만 했지만, 군대에 갔다 온 후에 예능이나 시트콤 등에도 출연하고, 영화음악도 꽤 하게 되면서 개인앨범 발매 주기가 상당히 늦어져서 그런 이미지가 생긴 듯하다. 그래서 두 자리수 앨범을 낸 가수임에도 개그맨이 장난으로 앨범을 내지 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러는 사람들이 있다.
올드 팬에게는 내가 좋아했던 가수가 맞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예능에서 이미지 변신을 했다. 다만 라디오에서는 전성기 때부터 이렇게 깐족거렸다.
2011년 2월에 라디오 스타에서 정관수술을 했음을 고백했다. 이미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사실 강호동과 윤종신은 굉장히 친한 사이로 윤종신이 아내를 만날 때 강호동이 바람잡이 역할로 계속 둘을 엮었다고 한다. 전미라가 처음에는 키 작은 남자에는 관심이 없었고 윤종신도 마찬가지였으나 계속 엮다 보니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미라는 결혼 전까지 윤종신의 노래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2012년 2월 윤종신은 SBS 힐링캠프에 출연해 난치병인 크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혔다. 크론병은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이어지는 모든 소화기관에 염증이 생길 수 있는 병으로, 수술로도 완치는 불가능하며 평생 약물치료를 해야 하는 병이다. 윤종신은 2006년에 처음으로 병에 걸린 것을 알았다고 한다. 너무 늦게 발견해 소장을 60cm나 잘라야 했고 지금은 약물 치료 중이라고 한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윤종신이 지금까지 예능에서 치질에 걸렸다는 얘기를 하며 웃으며 했던 얘기가 사실은 이 크론병으로 인한 치루질환을 말한 것이었다. 난치병을 웃음소재로 바꿔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줘야 했던 윤종신의 안타까운 고백이었다. 이 소장수술을 하고서 마취가 풀리면 링거에 연결된 모르핀이 조금씩 나오도록 장치를 해 놨다고 한다. 간호사가 너무 아플 때마다 버튼을 한번씩 누르라고 했다고. 그런데 마취에 깨면서 “아, 아! 아!!!” 비명 지르며 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뾱 그리고 3일간 기절해 있었다고 조미료 섞인 썰을 예능에서 풀었다. 아직도 소화기 쪽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모양. 김구라에 따르면 윤종신이 배가 아파 라스 녹화가 지연된 바 있다고 한다. 링크
과거 윤종신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치아교정으로 젊을 때보다 나이 들어서 외모가 준수해진 케이스의 연예인이다. 과거엔 입이 유재석 같이 돌출형이었으나 교정을 하면서 인상까지 좋아졌다. 이 때부터 정우성 닮았다는 드립을 치고 다닌다. 교정은 2010년 전후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덕인지 오래전 그날 때나 좋니 때나, 나이가 거의 비슷해 보인다.
정치성향은 중도진보에 가까운 듯하다. 2008년 명랑 히어로 출연 당시에는 이경규와 함께 광우병 촛불시위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김구라가 이를 물고 늘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2016년 박-최 국정농단 사태 때 ‘용기를 내어’ 가족들과 함께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이 때의 감상을 바탕으로 2016년 12월 월간 윤종신 ‘그래도 크리스마스’를 작사 작곡했다. 마침 그 곡의 가사가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에 소개되고, 이 인연으로 뉴스룸에 인터뷰로 출연하기도 했다.
온누리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런데 2017년 월정사에서 공연도 했고, 이에 대해서 좋은 평을 남기기도 해서,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진중권 교수와 트위터 상에서 외모(둘 중에 누가 더 잘생겼냐는)에 대한 논쟁을 벌였으며, 이에 유희열은 전파낭비라고 라디오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이 얘기를 접한 윤종신은 “이게 웬 하수의 기웃거림인가?…..ㅋㅋㅋ”라는 트윗을 남겼다. 이후에도 SNS에서 종종 서로 까는 모습이 등장한다. 물론 분위기 자체는 가볍게 놀리는 정도.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난 적도 있다. 2014년에는 같이 예능에도 출연하고, 심지어 히든싱어 윤종신 편에는 진중권도 패널로 출연했다.
하지만 패션 디자이너인 송지오와 가히 쌍둥이급으로 쏙 닮았다.
김구라도 칭송하는 가요계의 황태자에서 김구라의 밥으로 전락한 비운의 음악가. 윤종신은 이 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이걸 4년이 넘게 기억하고 있었다.
MBC청룡 시절부터 야구팬이었으며 연예인 야구단들 중 하나인 ‘恨’에서 내야수로 활동 중이다. 특이하게도 사회인 야구인에서는 보기 힘든 우투좌타이다.
연예인 중에서도 특히 잘 알려진 시계 마니아이다. 방송을 통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롤렉스 모델만 신/구형 서브마리너, 그린 서브마리너(초록베젤), 데이토나 등이며 그 외에도 태그호이어의 까레라 복각 모델을 자신의 뮤직비디오(1월부터 6월까지, 나쁜, 못나고 못난)에 착용하고 출연한다거나, 세이코의 SKX007 모델도 방송에 차고 나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계 뿐 아니라 2000년대 중후반부터 슈퍼스타 K나 라디오 스타 등에서 보여준 깔끔한 코디가 호평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윤종신의 패션 센스일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윤종신의 코디를 칭찬하고 있지만 ‘윤종신 코디’, ‘윤종신 스타일리스트’는 한때 검색어 자동 완성이 되었을 정도. 본인도 라디오 스타 MC들의 패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본인의 스타일리스트에 대한 칭찬을 인용하곤 하는 것을 보아 실제로 스타일리스트의 공이 꽤 큰 것으로 보인다. 튀지 않고 무난한 패션으로 키가 큰 편이 아니고, 특히 안경을 낀 일반인들은 롤모델로 따라 입을만 하다.
유희열의 말론 한때 본인을 한국의 기타노 다케시(비토 다케시)라고 자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장훈은 윤종신과 달리 비트 다케시는 재밌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다른 점이라면 다케시의 경우 코메디를 하다가 영화인도 겸하게 된 경우고 윤종신은 거꾸로 음악을 하다가 예능계로 손을 뻗은 경우. 둘 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순서를 떠나 비슷한 것은 변함없다.
팥빙수 노래 가사 중에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 좋아’라는 소절이 있는데 뒤의 ‘열라’가 은어라는 이유로 SBS에서 방송 금지 판정을 받아서 방송용으로 ‘열라 좋아’를 ‘진짜 좋아’로 수정한 버전도 만들었다.
명랑 히어로 두 번 살다에서 유희열이 윤종신의 상체 체형을 일컬어 시샤모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 이후 못친소 페스티벌에서도 한번 더 언급했다.
한때 포유류만이 고통을 느낀다는 주장을 믿고 있었던 듯 하다. 이를 강호동에게 전파했고 1박 2일에서 이 떡밥으로 논쟁이 벌어진 끝에 강호동(과 이승기)이 짜장면을 못 먹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심지어 방송용인가 실제 양인가는 몰라도 보통인데도 상당한 양이었다). 그리고 강호동은 본래 윤종신이 엄청나게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방송에서 어려운 문제에서 윤종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견가다. 포이라는 이름의 개를 오랫동안 길렀다. 한동안 윤종신의 인터넷 아이디는 poydaddy. 하지만 포이는 무지개 다리를 건넜고, 현재는 라울이란 이름의 리트리버와 라리라는 이름의 개를 기르는 중이다.
2011년, 디씨인사이드 윤종신 갤러리(약칭 깐갤)가 개설된 직후, 갤러리에 출몰 및 인증한 적이 있다. 닉네임은 왕왕왕이다. 댓글작성1,댓글작성2 최근 컴퓨터 화면이 캡처되었을 때 즐겨찾기에 디씨 갤러리의 아이콘이 등장한 적이 있다. 아마도 종종 눈팅하는 듯. 2017년 현재에도 계속 갤을 눈팅하고 있다. 갤에서 만든 움짤을 퍼가서 인스타에 출처 ; DC 윤종신 갤러리라고 당당하게 올렸다.
JTBC 예능프로 ‘나의 외사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영어 이름이 파블로(Pablo – Paul의 스페인어 버전)이다. 아마 대원외고 스페인어학과 시절 지은 이름이다.
국어국문학 전공자답게 예능에서 국어 문법과 관련한 개그를 종종 하는 편이다.
팬클럽 ‘공존’ 홈페이지에는 윤종신이 2001년부터 2012년까지 때때로 남긴 일기가 모여있다.
2018년 7월까지 평창동에서 카페 LOB를 운영했다. 현재는 폐업. 2018년 7월 23일부터 한남동 ‘월간 윤종신’ 스튜디오가 ‘월간식당’으로 개장했다.
아버지는 70년 넘게 활동한 1세대 사회복지사 윤광석 한사랑마을 초대원장이았다.
한국 가수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세대를 뛰어넘어 롱런하는 가수다. 가수 초창기의 청아한 미성으로 끌어 올리던 고음 가성에서 탄탄한 중저음을 위주로 보컬 스타일이 변했지만 본인의 감성을 끊임없이 재창조해내며 호평받고 있다. 과거 오래전 그날, 환생으로 대표되던 1990년대 전반기의 대표 명곡이나 배움, 너에게 간다로 대표되는 1990년대 후반기~2000년대, 좋니, 막걸리나, 본능적으로 등으로 대표되는 2010년대까지 전혀 음악성의 퇴보가 없이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잠시 침체기였던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까지 예능인 윤종신의 인지도에 음악인으로써 모습이 잠시 흐려졌던 모습도 보였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윤종신을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중에 하나로 뽑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근에 라디오 스타의 친분을 바탕으로 어떤 분의 유튜브 나레이션을 해주었다.
2021년 5월 K-POP 팬덤 플랫폼인 ‘버블’을 시작했다.
2021년 6월 알쓸범잡에서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다룰때 “곡 작업을 끝내고 사고가 일어나기 15분 전에 성수대교를 건넜는데 붕괴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대부분의 가사에 설렘을 설레임이라고 항상 틀린 맞춤법으로 표기한다.
본인은 키가 크지 않은 데 반해 딸 윤라임이 키가 엄청나게 크다. 13살인데 벌써 161cm에 육박했다.
현역 보스턴 레드삭스 소속인 요시다 마사타카 선수랑 매우 닮았다.
윤종신은 해외 여행 중 인생 첫 대상포진에 걸려 해외에서 병원에 가는 등 고생했다고 한다.
홍명보 현 울산 HD 감독과는 서울광장초등학교 1년 선·후배지간이며 홍명보 감독의 초등학교 1년 후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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