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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프로필 (영화 감독 제작가 각본가)

임권택 프로필 (영화 감독 제작가 각본가)

이름임권택
林權澤 | Im Kwon-taek
출생1934년 12월 8일 (89세)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 단광리
(現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
본적전라남도 장성군 남면 삼태리
본관나주 임씨 (羅州 林氏)
국적대한민국
가족아버지 임종영(1913 ~ 1966)
어머니 전주 이씨(1922 ~ ?)
배우자 채령(1951년생, 1979년 결혼)
장남 임동준(1980년생)
차남 임동재(1981년생)
학력월평국민학교 (졸업)
장성중학교 (졸업)
광주숭일고등학교 (중퇴)
직업영화 감독, 각본가
데뷔1962년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
활동1962년 – 2015년
종교천주교 (세례명: 바오로)
훈장금관문화훈장 (2002년 수훈)
보관문화훈장 (1989년 수훈)
체육훈장 맹호장 (2016년 수훈)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 제작자.

〈서편제〉로 한국 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춘향뎐〉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에 진출하며, 〈취화선〉으로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본상(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 영화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생애

1934년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면(現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의 소지주 가정에서 아버지 임종영(林鍾英)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만수(李萬秀)의 딸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소지주였으며 부친 임종영은 교사로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삼촌의 영향으로 8.15 광복 이후 좌익 활동에 입문하여 1950년 6.25 전쟁을 전후하여 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고, 고모부와 고종사촌들도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삼촌은 토벌대에 잡혀 8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후 6.25 전쟁 때 총살 당했고 부친은 건강이 나빠져 하산 후 자수했다.

임권택 자신과 남동생은 남면의 할아버지 집으로 맡겨져 광주숭일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위와 같은 일들 때문에 가세가 기울고 ‘빨치산 가족’이라는 낙인을 이기지 못한 탓에 18세 때 가출한 후 부산으로 가서 부두 및 시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군화 장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휴전 후 군화 중개사들이 ‘신생영화사’를 차렸고 1955년 임권택은 신생영화사 측의 제안에 따라 상경하여 〈장화홍련전〉(감독 정창화)의 스탭으로 들어가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소품부, 연출부를 거쳐 1960년 〈햇빛 쏟아지는 벌판〉을 시초로 조감독에 올랐고, 해당 영화를 만든 한흥영화사 사장 최관두가 임권택이 조감독으로서 만든 〈햇빛 쏟아지는 벌판〉 등의 예고편을 보면서 임권택에게 연출 제안을 했고, 그 길로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 데뷔했다.

초기에는 멜로, 액션, 무협, 스릴러, 코미디 등 여러 장르를 섭렵하다 1973년 〈잡초〉를 시초로 진지한 장르를 처음 구사했고, 1997년, 제8회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상 예술, 문화상을 수상했다. 2015년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주최하는 단체인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MPAS)의 감독 지부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작품 특징

전술하듯 1962년에 데뷔한 이후 초기 10여년 동안 멜로, 뮤지컬, 무협, 액션, 코미디, 스릴러 등 잡다한 장르를 총망라하며 미국, 홍콩 영화들을 모사/초월하고자 했으며, 1970년대까지는 주로 반공, 반일 영화가 많았다. 생계와 흥행을 위해 잡다한 저예산 반공·반일 영화를 양산하던 가운데, 1970년대 초에 우연히 해외 영화제에 참가하려 난생 처음 외국을 나갔다가, 한국어 한 마디 들리지 않는 풍경에 충격을 받고, 자신이 주목해야 할 것은 외국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1979년 〈족보〉를 전후하여 임권택 감독은 변질된 유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역사적 전통, 한국 현대사의 여러 비극에서 비롯된 한(恨) 등의 주제를 탐구해 나갔다. 1986년 영화법 개정으로 규제가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강수연이 출연한 〈씨받이〉라는 영화를 만들며 한국을 대표하는 문예영화·예술영화 감독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19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만들면서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이라는 든든한 파트너를 만나서는 경력의 최전성기에 접어들었다.

작품마다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며 다채롭게 경력을 채운지라, 경력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된 특색이 없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도 1980년대 이후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롱테이크(ex.〈서편제〉의 3분 롱테이크)나 플래시백(과거로 회상) 등의 기법 등을 자주 사용하며, 이미지와 소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는 특징을 보인다.

몇몇 작품들은 소설가 이청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데, 이 두 사람은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관계였다고 한다.

흑역사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한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이 벌어먹고자 1960년대에 마구잡이로 찍어 만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물론 당시는 반공 영화가 국책사업이었다.). 2007년도 인터뷰에서도 그랬다.

Q:초반에 만드신 50여편에 대해선 여전히 부정적이세요?(질문자)

A:당연히. 그때도 고통스러웠고 지금도 고통스러워요.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그 50여편 중에 내가 쓴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는 한편도 없어요.(임권택)

워낙 다작을 해서인지 한 인터뷰에서 웃지 못할 일화를 밝힌 적이 있다.

Q: 정말 많은 영화를 만드셨는데, 본인 작품을 다 기억하시는가?

A: 전에 부인이 거실에서 흘러간 영화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같이 봤는데 너무 재미가 없더라.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재미없는 걸 만든 거야? 했는데 엔딩 크레딧 보니 내 작품이더라.

물론 이 발언은 반쯤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감독이 자기가 만든 영화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게다가 그는 영향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 영화는 안 본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재미없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서 크레딧까지 확인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는 1960년대 작품을 자신의 필모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완곡하게 하고 있을 뿐이다.

데뷔 초기인 1960~1970년대에는 양산형 반공물, 반일물만 10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1년에 몇 편씩 만들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는 지금보다 한참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를 보호하고 무분별한 해외 영화 수입을 막기 위해, 영화법을 재정해 영화배급사를 20개로 한정하고 이 회사들이 국산영화 4편을 만들어야 해외영화 1편을 수입할 수 있었다. 당시 기술력, 기획력, 인프라 등 모든 면에서 떨어졌던 대한민국 영화업계는 국산영화는 대충 저예산으로 만들고 수입영화를 흥행시켜 국산영화 제작비까지 회수하는 전략을 썼는데, 이런 환경상 1950년대 임화수 시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반공, 반일 전쟁영화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양산형 국산영화를 찍어내던 게 바로 임권택 감독. 임권택은 정식으로 영화에 대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전혀 없고, 영화 스탭부터 시작해서 조연출을 거쳐 감독이 된 이후 다작으로 영화를 워낙 많이 만들다 보니 지금의 연출 능력이 생겼다고 술회한 바 있다. 많이 만들면서 시행착오도 많이 겪어보면서 스스로 배운 셈이다.

이러한 영화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선 임권택 가족의 내력도 간과할 수 없는데,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서중석 저)>와 2014년 정성일 칼럼 등을 종합해 보면 전술하듯 임권택의 선친이 좌익 활동을 했던 적이 있어서 연좌제 대상에 올랐던 적 있었던 터라 임권택은 “나도 반공영화를 만들 줄 아는 사람으로 봤으면 한다”라는 자기방어적 차원에서 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렇기에 하길종 등처럼 유신 체제의 영화 통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래도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 보면 감독이 감독이니만큼 특출난 부분도 많기 때문에 현대 들어서 연구자들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다만 본인은 이런 재평가 자체도 꽤나 껄끄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대표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년)

《잡초》(1973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년)

《만다라》(1981년)

《씨받이》(1986년)

《장군의 아들》(1990년)

《서편제》(1993년)

《태백산맥》(1994년)

《춘향뎐》(2000년)

《취화선》(2002년)

《하류인생》(2004년)

작품

연도작품명출연
1962《전쟁과 노인》최무룡, 김혜정, 김승호, 신영균
1962《두만강아 잘 있거라》김석훈, 문정숙, 엄앵란, 황해
1963《남자는 안 팔려》구봉서, 이대엽, 최지희
1963《망부석》이경희, 최남현, 신성일, 김운하
1963《신문고》김진규, 최남현, 이경희, 허장강
1964《욕망의 결산》신성일, 김혜정, 이경희, 이대엽
1964《십자매 선생》김승호, 주증녀, 황정순
1964《십년세도》신영균, 전계현, 김동원, 허장강
1964《영화 마마》도금봉, 김진규, 김운하
1964《단장록》신영균, 도금봉, 태현실
1964《단골 지각생》김승호, 황정순, 전영선, 김석훈
1965《빗속에 지다》신영균, 허장강, 엄앵란
1965《왕과 상노》신영균, 김지미, 김승호
1966《전쟁과 여교사》김진규, 엄앵란, 박암, 이경희
1966《나는 왕이다》태현실, 신성일, 김승호
1966《닐니리》김진규, 김지미, 트위스트김, 독고성
1966《법창을 울린 옥이》문희, 김운하, 최남현, 최무룡
1967《망향천리》신영균, 김지미, 문희
1967《풍운의 검객》남궁원, 남정임
1967《청사초롱》신영균, 남정임
1968《요화 장희빈》신성일, 남정임, 태현실, 도금봉
1968《바람같은 사나이》신영균, 남정임, 백영민, 서영춘
1968《몽녀》김지미, 박노식, 남정임
1968《돌아온 왼손잡이》박노식, 김지미, 허장강
1969《뢰검》안길원, 안일력, 김청자
1969《비나리는 고모령》김희갑, 문희, 박노식
1969《상해 탈출》이순재, 윤소라, 김성옥
1969《황야의 독수리》장동휘, 김희라, 박노식
1969《신세 좀 지자구요》구봉서, 김희갑, 조미령
1969《십오야》박노식, 남진, 남정임, 이낙훈
1969《사나이 삼대》김희라, 문희, 박노식, 장동휘
1970《이슬맞은 백일홍》문희, 김희라
1970《월하의 검》김지미, 윤양하, 김명진
1970《애꾸눈 박》박노식, 남정임, 최봉, 주란지
1970《속눈썹이 긴 여자》최무룡, 문희, 윤양하
1970《그 여자를 쫓아라》장동휘, 윤정희, 김희라
1970《비검》안일력, 안인숙, 김희라
1970《비나리는 선창가》장동휘, 윤정희, 김희라
1970《밤차로 온 사나이》박노식, 윤양하, 고상미, 허장강
1971《원한의 두 꼽추》황백, 윤양하
1971《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박노식, 문희
1971《요검》윤양하, 안걸원, 채령
1971《명동 삼국지》최무룡, 김지미
1971《둘째 어머니》김지미, 신성일
1971《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김희라, 김창숙
1971《30년만의 대결》최무룡, 박노식, 김지미, 윤양하
1972《삼국대협》김희라, 신영일
1972《명동 잔혹사》박노식, 윤정희
1972《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신성일, 윤정희
1972《대추격》신성일, 진도희, 윤양하
1973《잡초》장동휘, 최무룡, 신영균, 박노식
1973《장안 명기 오백화》박노식, 신성일, 고은아, 태현실
1974《증언》신일룡, 김창숙, 김희라, 김요훈
1974《울지 않으리》이승현, 박지훈, 황해, 이영옥
1974《연화》이순재, 박병호, 이효춘, 고은아
1974《속 연화》이순재, 박병호, 이효춘
1974《아내들의 행진》김희라, 윤미라, 최남규, 서영석
1975《왜 그랬던가》허장강, 박근형, 양광남
1975《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최정훈, 채령
1976《낙동강은 흐르는가》진유영, 유영국, 이해룡
1976《맨발의 눈길》이인옥, 김희라
1976《아내》태현실, 박근형, 한은진
1976《왕십리》신성일, 김영애, 백일섭, 최불암
1977《옥례기》김윤경, 이일웅, 백일섭, 한은진
1977《임진왜란과 계월향》정윤희, 이일웅, 신성일, 윤양하
1978《가깝고도 먼 길》이진호, 손지훈, 방수일
1978《상록수》한혜숙, 김희라, 김형자, 이일웅
1979《족보》주선태, 하명중, 한혜숙, 독고성
1979《저 파도위에 엄마 얼굴이》이영수, 채령, 주선태, 고상미
1979《내일 또 내일》이덕화, 정희, 주현, 박은수
1979《신궁》윤정희, 김희라, 홍성민, 방희
1980《깃발없는 기수》하명중, 김영애, 주현, 고두심
1980《복부인》한혜숙, 박원숙, 윤양하, 장철
1981《만다라》안성기, 전무송, 방희
1982《우상의 눈물》진유영, 박근형, 권기선, 이구순
1982《나비 품에서 울었다》이영하, 나영희, 한지일, 윤양하
1982《오염된 자식들》안성기, 방희, 조남경, 최성호
1982《안개 마을》정윤희, 안성기, 진봉진, 오영화
1982《아벤고 공수군단》신일룡, 남궁원, 정윤희, 윤양하
1983《짝코》김희라, 최윤석, 방희, 김정란
1983《불의 딸》박근형, 방희, 김희라, 윤양하
1984《비구니》김지미
1984《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한영수, 조용원, 윤양하, 전무송
1985《길소뜸》김지미, 신성일, 한지일, 이상아
1985《씨받이》강수연, 이구순, 윤양하, 방희
1986《티켓》김지미, 안소영, 이혜영, 진세영
1987《아다다》신혜수, 한지일, 이경영, 전무송
1988《연산일기》유인촌, 김진아, 권재희, 마흥식
1989《아제 아제 바라아제》강수연, 진영미, 유인촌, 한지일
1990《장군의 아들》박상민, 신현준, 이일재, 김형일
1991《개벽》이덕화, 이혜영, 김명곤
1991《장군의 아들 2》박상민, 이일재, 송채환, 신현준
1992《장군의 아들 3》박상민, 오연수, 이일재, 신현준
1993《서편제》김명곤, 오정해, 김규철, 안병경
1994《태백산맥》안성기, 김명곤, 김갑수, 오정해
1996《축제》안성기, 오정해, 한은진, 정경순
1997《창》신은경, 한정현, 최동준, 정경순
1999《춘향뎐》이효정, 조승우, 이정헌, 김성녀
2001《취화선》최민식, 유호정, 안성기, 김여진
2004《하류인생》조승우, 김민선, 김학준, 유하준
2007《천년학》조재현, 오정해, 임진택, 장민호
2011《달빛 길어올리기》박중훈, 강수연, 예지원, 안병경
2015《화장》안성기, 김규리, 김호정, 연우진

수상

연도영화제/시상식부문작품
1976제12회 백상예술대상영화부문 감독상왕십리
1977제13회 백상예술대상영화부문 감독상낙동강은 흐르는가
1978제17회 대종상감독상족보
1981제20회 대종상감독상만다라
1983제19회 백상예술대상영화부문 감독상안개마을
1986제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감독상길소뜸
제25회 대종상감독상티켓
1987제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감독상
제32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씨받이
제26회 대종상감독상연산일기
1991제2회 춘사국제영화제감독상개벽
제12회 청룡영화상감독상
1993제1회 상하이국제영화제감독상서편제
제1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감독상
제4회 춘사국제영화제감독상
제14회 청룡영화상대상
제31회 대종상감독상
1996제17회 청룡영화상감독상축제
1997제33회 백상예술대상영화부문 감독상
2000제36회 백상예술대상영화부문 감독상춘향뎐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넷팩상
제45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심사위원특별상
2002제23회 청룡영화상감독상취화선
제55회 칸 영화제감독상
2005제5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명예 황금곰상
2007제10회 디렉터스컷 어워즈감독들이 뽑은 최고의 감독상천년학
2015제9회 아시안 필름 어워즈공로상
2016제21회 춘사국제영화제공로상
제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공로영화인상
2021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국내 3대 영화상인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대종상영화제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며, 총 13회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는 대한민국 영화감독 중 최다 기록으로, 2위 기록인 6회 수상과는 무려 더블스코어 이상의 차이. 또한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에 걸쳐 감독상을 수상한 유일한 감독이다.

1993년 프랑스 문화원에서 동양인 감독으로서 2번째로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첫번째로 수상받은 이가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였으며, 1990년 한국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 구로사와와 인터뷰를 할때도 한국인 감독으로 잘 알고 영화를 꾸준히 본다고 한 게 임권택이었다.

2002년 7월 문화예술분야 최고등급 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05년 2월 12일 베를린 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예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경쟁부문 수상작에게 주는 황금곰상은 도금한 것이지만, 이 명예 황금곰상은 100% 순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임권택이 황금곰상을 들고 있는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크기도 상당히 크다. 베를린 영화제 측에서 상을 주면서 만약 팔거라면 우리한테 되팔라고 농담을 했었다고.. 현재 이 황금곰상은 부산의 임권택영화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아다다는 1988년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21년 10월 6일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했다.

논란 및 사건 사고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막식 망작 연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개막식 총감독을 맡았으나 그간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망작을 연출하고 말았다는 것이 중평이다. 본인은 예산(200억 원)이 부족했다고 주장하나 실제로 들여다 보면 돈이 부족하진 않았을 것 같은 퀄리티였다.

미성년자 포함 노출신 강제 이력

미성년자를 포함해 출연자 강제 노출신 촬영 전적 때문에 21세기 들어 문제시된 케이스가 여럿 존재한다.

가장 공론화된 케이스는 1986년 영화 길소뜸으로, 촬영 당시 13~14세 즉 중학교 2학년였던 이상아에게 강제로 전라노출신(뒷모습)을 촬영하게 한 사실이 세바퀴를 통해 밝혀졌다. 처음에는 그런 걸 촬영할 리가 있겠느냐며 이상아 배우와 배우의 어머니를 속이며 촬영에 들어갔으나 이후 촬영이 진행되어 이상아의 보호자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 남성 스태프들이 그녀를 둘러싸며 전라노출신을 찍는다고 놀렸고, 이에 사실을 알게 된 이상아가 이를 거부하자 “전라 베드신 안 찍으면 찍은 장면 다 물어내야 된다”라고 협박하여 미성년자 베드신 및 누드 노출씬을 찍었다. 관련기사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세간은 물론 네티즌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다.

길소뜸 케이스는 영화계 여성 출연자 부당대우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생긴 이후에 폭로되어서 논란이 컸지만 2000년 영화 춘향뎐은 조금 애매한 입지에 있다. 당사자가 당시 일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하다가 일찍 은퇴해버렸고 이미 제작 당시 논란을 예술성으로 잠재워버리고 완성한 탓에 일사부재리적 느낌으로 다시 죄를 묻는 움직임이 적었기 때문이다. 다만 논란 자체는 존재했고 당시 주연으로 출연한 배우 이효정은 영화 촬영 당시 16세 미성년자였는데 영화 상에서 베드신과 노출신 분량이 있어서 해당 씬을 촬영 당시 많이 힘들어 했다고 밝힌 바가 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영화라기 보다는 길소뜸 케이스의 보조 증거로 많이 활용되는 정도다.

1986년 영화 티켓은 길소뜸이나 춘향뎐처럼 예술 영화로 포장되던 작품이라기 보다는 전형적인 호스티스 영화에 해당해 메스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이 작품 역시 배우의 후일담 때문에 논란의 케이스로 기록되었다. 주연 중 하나로 출연했던 배우 안소영은 애마부인 등 에로영화 출연 이후 힘든 시기를 겪다 임권택이 자신을 예뻐해주자 자신을 배우로 생각해주는 사람을 만나 좋았다고 회고 했다. 그러나 티켓에서 역시 임권택이 베드씬을 위해 벗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임권택 앞에서 엉엉 울었다며 “어떻게 감독님마저 날 벗기려고 하냐”고 해 배우 김지미가 해당 씬을 대신하며 베드씬을 면했다고 한다.

상술 영화들은 모두 20세기 구시대 케이스로서 ‘어르신 왜 그러셨어요’ 정도로라도 반성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면, 21세기 들어 2014년에 촬영한 마지막 영화 화장에서 마저 사전미협의 노출 강요 논란이 있었다. 배우 김호정의 성기 노출 장면이 사전 합의 없이 현장 결정으로 촬영되었던 것이 드러나며 다시끔 논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김호정 본인은 당황했지만 요청에 따라 담담히 촬영했다며 회고했으나, 이미 임권택이 사전고지 없이 노출씬을 촬영하는 행태가 알려진 이후였기 때문에 논란이 이어지게 되었다.

논란이 여러번 일어나고 장본인이 연출을 은퇴한 이후에도 녹차의 중력 같은 다큐멘터리가 나올 정도로 기본적으로는 영화계의 존경받는 감독으로 남아있지만 상술 논란의 영향으로 공개적으로 존경을 표하기는 어려운 감독이 되었고 대중에의 유명세도 많이 사그라들었다. 완벽한 예술적인 영화를 찍는 감독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고용 감독으로서 엄청난 다작을 하다가 개중에 예술적 성취를 인정받는 영화들이 나왔던 것인데, 21세기에 들어 예술 영화를 찍는 영화계 큰 어른이라는 이미지만 받아들였던 임권택의 작품들을 직접 소비하지 않은 대중에게는 논란이 크게 다가왔고 딱히 임권택 감독에 대해 변호할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의 반응이 이렇다보니 영화인은 물론 영화 애호가들도 아제 아제 바라아제, 서편제, 취화선 등 영화에 대한 언급이 아니고서는 개인으로서의 임권택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다소 꺼리고 있다. 당연하지만 알고리즘의 영향을 많이 받는 구글에도 관련 검색어로 논란 사실이 쉽게 뜬다.